사물함 나눠 쓰는
*
단대 건물 앞에 잔디밭이 새로 생겼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3월 2일이 왔고, 등교해보니 잔디밭이 생겨나있었다. 마법처럼. 우리 등록금으로 깔았을 테니 우리가 개시하자. 훌륭한 제안에 과방 안의 모두가 기뻐했다.
과방을 뒤져보니 돗자리가 있긴 했는데 남자 일곱의 몸을 받아주기엔 한참 모자랐다. 아무도 읽지 않는 학교 신문을 몇 부 집어 들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잔디밭으로 나갔다.
몸의 반은 돗자리에, 나머지 반은 신문지에 의탁하고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냠냠하는 기분은 멋졌다. 퇴근하는 태양을 잔디 위에서 배웅하는 개강 첫 주. 아무도 싫은 소리를 하지 않았다. 괴로움, 즉 과제가 없으니 다들 가벼운 이야기만 꺼냈다. 평소엔 거의 하지 않는 각자의 시시콜콜한 연애담이 흘러나온 것도 그래서였다.
“넌 좋아하는 사람 있냐?”
“모르겠는데.”
호원의 싱거운 대답에 성열이 도로 누웠다. “호감 가는 사람은 있어도 좋아한다고 먼저 말하긴 어려운 것 같아. 요즘은 다들 그래.” 호원의 알쏭달쏭한 말에 성종의 귀가 쫑긋 섰다. 어렵다고?
“근데 뭐 꼭 연애를 해야 하나.”
곧게 누워 하늘만 바라보는 성규의 얼굴은 평화로웠다. “연애는 확실히 장점이 있지. 있는데, 단점도 존나 많으니까.” 그 말을 하는 성규의 손에서는 어디선가 주워온 나뭇가지가 또각또각 분질러지고 있었다.
“진짜 지-인짜 마음에 드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 이상 연애는 그만 됐어.”
진짜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 성종은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자는 동우를 힐끗 쳐다보았다. 너른 등이 평화롭게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했다. 아이스크림이 녹아 똑똑 떨어지고 있었고, 해가 천천히 기울었다. 아이스크림의 방향을 바꿔 손이 아니라 풀밭에 녹아내리도록 하면서, 평화를 깨트릴 계획을 짰다.
*
필요한 책만 가방에 넣고 바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동우는 사물함 문을 붙들고 허둥댔다.
“…….”
이것은.
동우는 엄지와 검지를 사용해 그것을 집었다가 급히 다시 사물함 안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보안 카메라는? 사방의 천장과 벽을 살폈지만 카메라 또한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곤 또 입을 가렸다. 동우를 제외하면 그림자 하나 얼씬 안 하는 복도가 굉장히 음험하게 느껴졌다. 누가 지켜보고 있는 거 아닐까. 복도가 꺾어지는 곳과 사물함 옆 창문 밖까지 살폈다.
귀는 물론이고 얼굴 전부가 화끈거렸다. 보나마나 엄청 새빨간 색일 것이다. 가방에 공책이며 교과서를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혼란스러워서 자꾸만 헛손질을 했다. 누가 날 놀리려고 그런 걸까? 하지만 자물쇠로 잠가두는데 어떻게? 이런저런 추측으로 머리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사물함 문을 쾅 닫는데 문에 붙은 이름표가 커다랗게 눈에 들어왔다.
27. 장동우(09), 이성종(12)
그렇지. 이 사물함은 혼자 쓰는 게 아니지. 자물쇠도 성종이가 걸어둔 거였지.
……솔직히 성종이라고 이유를 알 것 같진 않지만, 오히려 못 알아들을 것 같지만, 그래도 한 번 물어보기로 했다. 휴대폰을 꺼냈다.
*
신호가 가는 동안 무슨 말로 대화를 시작할지 고민하려 했는데 성종은 너무도 빨리 전화를 받았다. 꼭 동우가 전화 걸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그 속도에 깜짝 놀란 나머지 부드럽게 돌려 물으려던 애초의 다짐은 홀라당 날아가고, 동우는 맨 땅에 헤딩하듯 제일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성종아!”
-네, 형.
“우리 사물함 말인데… 저기, 그, 자물쇠 비밀번호, 다른 사람한테 알려준 적 있어?”
-아니요?
“아 그래? 그렇구나아…….”
전화기 너머의 성종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친절하고 평온했다. 동우는 순간 제가 술이라도 쳐먹고 사서 넣어뒀다가 잊어버린 게 아닐까 고민했다. 의심한 스스로가 부끄러울 정도로 성종의 목소리는 상냥하고 순진하기만 했다. 주머니에 넣어둔 네모나면서 동시에 동그란 이것을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성종은 해답을 가진 것 같지 않았다.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으려는데 성종이 물었다.
-왜 그래요. 뭐 없어졌어요?
“아니! 그건 아니고… 오히려 뭔가가 생겨났는데…….”
-뭐가요. 뭐가 생겨났는데요?
성종의 말투가 집요하게 느껴지는 것은 기분 탓일까. 괜히 부끄러워서 잠시 말없이 있었더니 성종이 넌지시 동우를 불렀다. 형아,
-저 어디 사는지 알죠?
“응? 응.”
-사용법 알죠?
“응?”
-오세요.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뒤따르는 목소리가 들떠있다. 기다리고 있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