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콜릿 만들기를 시도하다 포기하는






  내가 이걸 무슨 생각으로 샀지. 키트를 손에 들고 성종은 고개를 갸웃 했다.




  2월엔 여자가 남자에게, 3월엔 남자가 여자에게 준다고들 하는데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우리는 성별이 같은데? 그러니까 그런 거 없어. 그런 사고를 거쳐 무심하게 보내오던 날이다. 몇 년 동안 이어진 연애 기간 동안 한 번도 챙긴 적 없는 날. 둘 다 성격이 그렇게 섬세하지 못해서 챙기는 기념일은 생일 정도가 전부다. 100일도 안 챙기고 500일도 안 챙기고. 그런데 이런 날을 챙길 이유가 없지. 뜬금없이 말야.

  마트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 조수석에 앉은 동우의 옆얼굴을 힐끗 쳐다보고 성종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마트 안에 쌓여있던 초콜릿 산이라든가, 사랑을 선물하라는 표지판 같은 것들은 동우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한 모양이었다. 좋아, 이대로 오늘을 보내버리자. 커플이라고 해서 반드시 발렌타인 데이를 챙겨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게 결심을 하고 10초 후 성종은 동우에게 물었다.


  “형아.”

  “응.”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


  눈을 크게 뜨고 깜빡이는 모습은 사랑스러웠으나 명쾌하진 않았다. 어리둥절해 하는 동우의 무릎을 토닥여 주었다. 모르면 그냥 몰라두 돼.




  그러나 집으로 돌아온 성종은 몰래 부엌으로 가서 외투 안에 숨겨뒀던 초콜릿 만들기 키트를 꺼냈다. 잠깐 내가 내가 아니었나 봐. 아까 마트에서 동우가 안보는 사이 몰래 하나를 집어다 계산까지 해치웠다. 오늘 눈 떠서부터 지금까지 초콜릿이 무슨 대수냐는 자아와 그래도 챙겨보고 싶다는 자아가 아주 제대로 엉킨다. 그래서 어떤 자아가 이길 건지 나한테 미리 귀띔 좀 해주지 않을래? 눈살을 찌푸리고 괜히 죄 없는 키트를 노려보았다.

  부엌과 거실을 가르는 커튼을 살짝 걷고 동우가 무엇을 하는지 살폈다. 소파에 누워있다. 저러다 잠들 것 같은데. 잠들기 전에 물어볼 요량으로 총총 다가갔다.


  눈을 감고 있는 동우를 관찰하다가 조그맣게 물었다. 자? 자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물어본 건데, 요행히 답이 돌아왔다. 한 박자 늦게. 아니, 안 자. 코를 찡긋대며 동우가 대답했다.


  “형아.”

  “응.”

  “초콜릿 좋아해?”


  동우가 배를 긁으며 대답했다. 다른 한 손으로는 눈가를 비비는 모습을 보니 꽤나 피곤한 것 같다.


  “생각해 본적 없는데… 언제까지 대답해줘야 해?”


  아냐아냐, 중요한 질문 아냐. 일어나려는 동우의 가슴팍을 짚어 도로 눕혔다. 그럼 나 자도 돼? 잠투정을 하는 동우에게 기다리라고 하고 방에서 이불을 꺼내왔다. 빨리 잠들라는 의미에서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눈을 뜨면 더 이상 발렌타인 데이가 아닐 거야! 성종이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른 채, 동우는 보송보송한 이불의 감촉이 좋아 그저 꼬물거렸다.




  초콜릿을 ‘중탕’하라는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그만 불에 올려둔 우유가 끓어 넘쳤다. 끓어 넘친 우유는 가스 불을 꺼트렸다. 망했네. 거무스름하게 눌러 붙은 우유는 더 이상 우유가 아니었다. 발렌타인 데이 안 챙긴다고 하면서 왜 자꾸 이러지. 아니, 애초에 그냥 사서 주면 됐잖아. 그런데 왜 굳이 내가 이걸 만들고 있냐구. 스스로도 이해가 안 가는 답답함에 성종은 냄비로 머리라도 두드리고 싶었다.


  내다본 거실은 잠잠했다. 동우의 수면욕은 이 정도로는 타격을 입지 않는다. 패배자처럼 터덜터덜 거실로 나가니 정적을 배경으로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이불 안에 손을 집어넣어 가슴께를 살살 흔들었다. 일어나봐. 물어볼 거 또 있어. 성종의 애처로운 목소리를 듣고 동우의 눈이 아주 가늘게, 실눈으로 뜨였다.


  “형아.”

  “응.”

  “발렌타인 데이랑 화이트 데이의 차이점을 알아?”


  바라본 동우의 표정은 뭐랄까… 시공간의 틈새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눈은 분명 성종을 향하고 있는데 눈동자 속에 총기가 하나도 없었다. 전혀 모르는구만. 그래도 괜찮아. 그래도 예뻐. 성종은 점점 벌어지는 동우의 입을 다물려 주고 입술 도장도 찍어주었다.






  그을린 냄비를 개수대에 던져 넣었다. 다 꽃 까라고 해. 조그맣게 종알거리곤 전화기를 집었다. 그리고 머리가 아니라 손가락으로 외우고 있는 번호를 눌렀다. 전화기를 든 채 거실로 걸어가 동우의 다리 위에 앉았다. 이제 통화 버튼만 누르면 연결된다. 아직 잠이 남은 눈가를 대신해서 문질러주자 키득키득하는 웃음이 굴러 나왔다. 좋아요?


  “형아.”

  “응.”

  “치킨 시킨다?”


  잠시 무슨 뜻인지 생각하는 듯 하던 동우가 이내 활짝 웃었다. 당장 엉덩이를 토닥이고 싶을 만큼 밝게.


  “그래!!”


  아이, 대답 잘하는 것 좀 봐. 예뻐 죽겠어. 오늘 하루 동안 동우에게서 얻어낸 대답 중에 가장 기운차다. 졸려워 하던 눈은 이젠 생기로 반짝반짝. 이게 치킨의 힘인가 싶어 웃기기도 하고. 그러고 보니 첫 데이트 때도 치킨을 먹었던 것 같다. 어렴풋 떠오르는 기억이 반가웠다. 결국 초콜릿 회사의 상술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대로 동우 위에 드러누워 통화 버튼을 눌렀다. 동네 치킨집 통화 연결음이 오늘따라 참으로 희망차다.


  연애 뭐 있나. 좋아하는 사람이랑 좋아하는 걸 하는 게 연애지. 진리를 되새겼다. 둘 사이를 갈라놓은 이불을 걷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