쫑다리 전력) 안녕
장동우 이성종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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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앞으로 누구랑 뭘 해먹고 살 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너보다 더한 또라이 만나서 개고생하다가 음식 잘못 주워 먹고 돌연사하길 빈다.
성종은 경쾌하게 마침표를 찍고 일어섰다. 하, 드디어 끝났어. 끝났다구. 어깨가 가벼워지는 것은 물론 허리 디스크도 씻은 듯이 나았다. 이별이야말로 현존하는 최고의 만병통치약인가 봐. 왜 더 빨리 안 헤어졌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성종은 쪽지를 식탁 한가운데에 고이 올렸다. 제가 썼지만 쪽지는 완벽했다. 감상적이지도 않고 질질 끄는 것도 없고. 게다가 짧아서 성인 ADHD가 의심되는 동우의 집중력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나란 애는. 마지막까지 장동우를 너무 사랑하네. 성종은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전구를 빼버린 형광등이 눈에 들어왔다.
성종은 집안을 거덜 냈다. 애초에 거의 비어있던 냉장고 속을 아예 치우고 쌀과 라면과 계란은 이웃집에 억지로 나눔했다. 물과 술은 마셔서 없애고 샴푸와 세제와 휴지는 소파 밑에 쑤셔 넣었다. 이불과 침대 시트는 커튼과 함께 욕조에 넣고 화장실 문을 잠갔다. 화장실 열쇠는 화분에 파묻었다. 속옷부터 외투까지, 동우의 모든 옷은 매트리스만 남은 침대 위에 내팽개쳐졌다. 팔찌와 목걸이는 전부 줄을 꼬아버렸고 반지와 귀걸이는 뒤집힌 양말 안에 한 개씩 넣었다. 미운 정도 정이어서 컴퓨터에는 그냥 비밀번호만 걸었다. 외장하드는 쓰레기통 밑바닥에 처박혔지만.
동우가 언제 돌아올지 몰라 성종은 그 모든 일을 진행하면서도 자꾸 불안했다. 평소에도 워낙 자유로운 영혼이라 언제 들어올지, 또 언제 나갈지 알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유난히 긴 자유 시간이었다. 동우가 그저께나, 최소한 어제에만 돌아왔어도 성종이 이런 짓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우는 오지 않았고 늘 그랬듯 연락 한 번 없었다. 그리하여 성종은 결심했다. 그 새끼가 기어들어오기 전에 내가 여길 뜨자.
이 위대한 이별을 위해 일찌감치 새 캐리어도 구매했다. 덕분에 짐을 챙기는 일이 즐거웠다. 현관에 놓인 캐리어의 손잡이를 쥐기 전에, 성종은 마지막으로 집안을 돌아보고 아까 쓴 쪽지를 확인했다. 어, 그런데 장동우보다 더한 또라이가 있을 수 있나? 성종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가 곧 펴졌다. 저주에 논리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마음이지. 사람이란 게 감정이 있고 마음이 있으니 장동우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것이다. 걔가 사람이 맞긴 맞다면. 성종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쪽지 대신 캐리어의 손잡이를 잡았다. 이제 정말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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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우는 구제가 불가능한 개새끼다. 성종은 심지어 사귀기 전부터 그걸 알았다. 와, 누가 저런 애랑 연애를 해. 몇 번 자는 거면 몰라도. 성종은 미래의 자신을 바보 취급하며 당시 사귀던 애인과 호박씨를 깠다. 동우를 그래도 점잖게 말해주려는 사람들은 자유분방이란 표현을 쓰지만 사실 동우는 천방지축에 엉망진창이라고 해야 옳다. 하고 싶은 건 해야 한다. 그게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치든 간에. 그게 누군가를 울리는 일이든 아니든 간에.
입고 싶은 거 입고 먹고 싶은 거 먹고 자고 싶은 사람이랑 자는 동우의 모습이 조금은 섹시하다고 느꼈을 때 성종의 인생길은 이미 고난으로 접어들었으나 성종은 그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여전히 동우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싫어하는 건 여전하지만 또 그만큼 반했다는 것을 금방 깨닫지 못했다. 성종이나 성종의 애인이 둘 중 한 명이라도 좀 똑똑했으면 그런 불상사는 막았을 텐데. 결국 어느 날 성종은 애인을 밑에 두고 동우를 떠올리고 말았다.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친구들의 친구들을 통해 동우가 자주 가는 장소들을 하나씩 알아냈다. 그 다음은 쉬웠다. 성종은 그 장소들에서 평소처럼, 예뻤다.
“너 진짜 예쁜데 그렇게 막 잘하지는 않네.”
처음 잤을 때 동우가 그런 말을 해서 성종은 어리둥절했다. 뭐라고? 방금까지 즐겁게 해놓고 왜 그런 말을 해? 아직 침대에서 나가지도 않았는데. 성종은 솔직히 상처 받았지만,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해보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여러 명하고 혹은 동시에 여러 명하고 붙어먹는 너랑 간간히 평범한 연애만 해온 나랑 실력이 같다면 내가 섹스의 요정이겠지. 게다가 넌 나보다 연상이라 주어진 시간도 더 많았다고.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성종은 일단 칭찬을 해주었다.
“그래? 넌 잘 해.”
“너 말고 형이라고 해야지.”
그 말을 들었을 때 왜 도망치지 않았어? 왜 옆에 있던 베개를 집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어? 훗날 성종은 일기장을 붙잡고 물었다. 내게도 톰 리들이 있어서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네. 그리고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ㅅㅅ? 하면 곧바로 ㅇㅇ! 이 돌아오는 사이에서, 다시 만나 배를 맞추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 과정에서 오간 대화나 성종이 받은 대접은 전혀 로맨틱하지도 상식적이지도 않았다. 동우와의 일화는 절친한 친구에게도 말하기 부끄러웠다. 가만히 앉아서 그런 대접을 받고 있다니. 장동우가 제발 가지 말라고 비는 것도 아닌데 좋다고 붙어있다니. 분별력이 있고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지 않을 짓을 성종은 하고 있었다.
나는 예뻐. 예쁜 건 좋은 거야. 다들 날 좋아하고 내가 예쁘다고 칭찬해 줘. 그리고 난 그게 좋아. 성종은 평생을 그렇게 살았고 칭찬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며 살았다. 다른 장점도 많았지만 성종은 예쁘다는 장점이 제일 자랑스러웠고 외모에 대한 칭찬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 그래서 성종의 이상형은 살갑고 끈기 있고 똑똑한 사람이었다. 예쁘다는 칭찬을 부끄럼 없이 할 만큼 살갑고, 예쁘다는 칭찬을 꾸준히 할 만큼 끈기 있고, 예쁘다는 칭찬을 다양하게 할 만큼 똑똑한 사람. 그러나 동우는 셋 중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했다. 동우는 대체로 무관심하고 무성의하고 영악했다.
가슴이 터지든 찢어지든 둘 중 하나는 됐다. 분명히 됐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아픈 게 설명이 안 된다. 성종은 팔짱을 끼고 앉아 골똘히 생각해보았다. 왜 이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지. 이름뿐인 애인을 계속 하는 것으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있는지. 해답이 눈앞에 있는데 안 보이는 척 다른 길을 찾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패배였다. 언제나처럼.
처음부터 알고 시작한 관계지만 그렇다고 아픔이나 서러움이 덜한 건 아니었다. 곱씹을수록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하나도 돌려받지 못한다니. 차라리 동우에게 다른 상대가 있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러면 성종도 포기하고 좋은 사람 골라잡아 잘 먹고 잘 살 수 있을 텐데. 동우의 오직 하나뿐인 구애 상대는 동우 자신이었다. 누구도 장동우가 장동우를 사랑하는 것만큼 깊은 사랑을 하지는 못할 거야. 성종은 잠든 동우를 빤히 내려다보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장동우는 장동우를 너무 사랑해서 장동우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해주려 든다. 남이 장동우의 행동에 어떤 상처를 받든 장동우 눈에는 장동우 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성종은 스스로 자기애가 깊은 사람이라고 자부해왔지만 동우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좀 본받고 싶기도 하네. 자신만을 위해 살 수 있을 만큼 용감하다니. 성종은 동우의 코를 한 대 치고는 자는 척 했다. 그 때의 성종에게는 딱 그 정도의 용기가 있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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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수도랑 전기도 끊을걸. 성종은 감자 칩 여러 봉지를 펼쳐놓고 돌아가며 집어 먹다가 후회했다. 명수는 집에 있는 음식 아무거나, 별이 밥 빼고는 다 먹어도 된다고 했지만 성종은 잠시 얹혀사는 주제에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근처 편의점에서 모든 종류의 감자 칩과 탄산음료를 사왔다. 이렇게 쓰레기같이 있으니까 정말 좋다. 장동우가 언제 들어오나, 들어와서는 언제 말 걸어주나 초조해 할 필요도 없고. 펩시와 코카콜라의 맛을 비교해보다가 괜히 서러움이 터졌다. 장동우 그 망할 놈은 탄산을 안 마셨지. 그렇게 건강 챙겨서 뭐해. 어차피 등에 칼 맞고 죽을 텐데. 음료수 하나 마시면서도 장동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성종은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억울하기 짝이 없다. 어떤 노래가 익숙해서 생각해보면 장동우를 기다리면서 들었던 노래고, 유명한 맛집이 가봤던 곳이어서 생각해보면 장동우와 가봤던 곳이고, 사진첩 정리하다보면 대부분이 장동우와 있을 때 찍은 사진이고. 말 그대로 요 몇 년 인생의 추억 대부분이 장동우다. 이렇게 이쁜 이성종의 인생에 뜬금없이 장동우가 꽉 들어차 있다. 그렇지만 장동우의 인생에서 이성종은 단역에 불과할 거고 바뀔 일도 없겠지. 성종은 그것이 억울해서 죽을 노릇이었다. 왜 혼자만 이렇게 앓아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을 만났으면 인생의 주인공은 계속 성종 자신이었을 텐데, 왜 하필 굳이 어쩌다 장동우였는지도 성종은 대답할 수 없다. 뜻대로 되는 일이 단 하나도 없다.
차분히 누워 떠올려 보았다. 지난 시간은 저울질이었다. 한 쪽에는 성종의 자존심, 다른 쪽에는 동우에 대한 끌림을 두고 하는 저울질. 처음에는 현저하게, 그 후에는 약간이라도 동우에 대한 끌림이 더 무거웠다. 오랫동안 패배했지만, 결국 기다리고 염원했던 대로 마침내 성종의 자존심이 승리했다. 그래서 성종은 동우에게 크고 아름다운 엿을 주고 떠날 수 있었다.
성종은 불현듯 깨달았다. 동우를 너무 오래 떠올리고 있었다는 것을. 저울질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한 번 이겼다고 방심해선 안 됐던 것이다.
망했다 진짜. 성종은 발로 이불을 차며 벌떡 일어났다. 당장 보고 싶었다. 그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 집 개로 사는 한이 있더라도 돌아가고 싶었다. 장동우가 밖에서 하의를 안 입고 돌아다녀도 좋다. 그래도 장동우의 애인 자리는 성종의 것이어야 했다. 장동우의 바지나 치마를 벗긴 인간에게 실례지만 그것은 제 애인이니까 부디 흠집 없이 사용하고 돌려주시길 바랍니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 말이라도 할 수 있고 싶었다. 성종은 거울을 다 보고 비비를 다 바르자마자 뛰쳐나갔다. 틴트를 손에 꼭 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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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라도 쓰지 말 것을. 누가 읽어도 이별 통보인 그 쪽지만 안 써놓고 나왔어도 어떻게 바득바득 우겨 볼 텐데. 집을 박살냈지만 헤어지자는 뜻으로 그런 건 아니라고, 그냥 너에 대한 사랑을 주체할 수 없어서 난리 좀 쳐보았다고 말도 안 되는 말을 할 수 있을 텐데. 택시에서 내려 전속력으로 집을 향해 가면서 성종은 눈물을 참았다.
동우가 아직 집에 안 왔을 가능성도 있다. 집에 들어갔다가 난장판인 집안을 보고 그대로 나가버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랬다면 당연히 쪽지도 못 봤을 것이다. 그리고. 봤으면 어때? 성종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숨을 골랐다. 거짓말 하면 된다. 형, 그거 다 거짓말이야. 그 쪽지 그거 내가 글씨 연습 한 거야. 형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악필이긴 하잖아? 갑자기 글씨 연습의 필요성이 너무 크게 와 닿았어. 형 애인인데 글씨 잘 써야지. 형 대신 글씨 써주려면. 그렇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일단 심호흡을 한 번 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쑤실 구멍은 있댔어. 성종은 차가운 현관문에 귀를 바짝 대고 눈까지 감았다. 집중했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원래 방음이 잘 됐던가? 3분 정도 기다려봤지만 큰 소리는 나지 않았다. 동우가 안에 있는지 없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성종은 될 대로 되란 심정으로 비밀번호를 누르고 심장을 토하지 않도록 주의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눈을 똑바로 뜰 용기도 없어 실눈을 뜨고 현관을 확인했다. 낯익은 신발 한 켤레가 있었다. 망했다 진짜22...
왜 이 집 거실은 천 평방미터가 아닐까. 왜 이렇게 작아서 부엌까지 몇 초면 다다르는 걸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동우가 있는 것 치고는 집안이 조용했다. 성종이 이대로 뒤 돌아 나가는 게 나을까 손을 떨며 고민하는 동안 띵, 하는 소리가 났다. 뭘까. 이 사랑이 쫑났다는 신호음일까. 겉옷 주머니에 손을 넣고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양말도 안 신은 맨발부터 헝클어진 푸석한 머리카락까지, 지금 성종이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인간이 맞았다. 눈이 마주쳤다.
"안녕."
"어……"
동우는 전자레인지 앞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뭐지? 아직 못 읽었나? 성종은 등이 서늘했지만 동우와의 관계에서 늘 그래왔듯 뭐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아까 무슨 변명을 준비했더라. 가장 보고 싶었던 인간을 보고 나니 할 말이 싹 날아갔다.
"밥 먹어."
식탁 위에서는 쪽지는커녕 종이 부스러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그 텅 빈 식탁 위에 동우가 즉석밥을 두 개 올려놓았다. 성종은 겁이 났다. 이 인간이 또 어쩌려고 이러지. 집안 꼴을 봤을 텐데 왜 이렇게 호수처럼 평안한 걸까.
“저기, 식탁 위에 있던 종이는……”
“버렸어. 밥 먹어.”
응. 성종은 의자를 빼서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