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관 207호의 사정: 3월
동우 성종
무한관 207호의 사정
3월
“힝. 이걸 어떻게 해.”
교수가 무작위로 나눠준 종이를 받아들고 성종이 울상을 지었다. 발표 과제. 게다가 3인 1조! 잉 몰라. 이거 뭐야 무서워ㅠxㅠ 하기 시러…. 대학교만 오면 만날천날 놀 수 있다며! 근데 내가 왜 과제를 해야 돼? 아니, 난 이쁜데. 그것도 엄청 이쁜데 왜 공부를 해야 해?!
<인간관계에서 언어의 중요성>. 막 대학교에 입학한 성종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과제였다. 3월 2일 개강 첫 날 첫 수업부터 과제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외모는 여느 여자 연예인 뺨치게 예뻤지만, 뇌 또한 청순했다. 어릴 적부터 공부 쪽으로는 재주가 없었고 시험 기간에는 뭣도 모르고 학교가 일찍 끝난다고 좋아했다. 수업을 하지 않는 시험 기간에는 시내를 쏘다니며 놀아서 정작 시험 끝나고서는 놀 건덕지가 없었다. 쫑꼬발랄한 생활을 이어가던 성종은 그 생활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 난 예쁘니까 분명 누군가 날 키워주겠지^x^ 안일한 생각이 고 예쁜 머리통에 쏙 박혀 있었다.
그래도 대학은 꼭 가야한다는 엄마의 닦달에 성종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고등학교 3년을 화실에 붙어살았다. 나중에 나이 먹어서 안 예쁘면 어떡할래? 엄마의 다그침에 그제야 겁을 먹었다. 공부는 글렀고, 전부터 꾸준히 해오던 미술에 사활을 걸었다.
친구들이 알바를 한다 성형을 한다 난리를 치는 1월에도 성종은 미대 시험을 치러 다녀야 했다. 그 결과, 성종은 스스로 생각해도 제 머리로는 과분한 대학교에 입학했다. 이제 애인도 생기고 미팅도 하고 축제에서 술도 퍼마시는 나날이 온 거야! 공부 같은 건 안 해도 돼! 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성종은 눈물을 훔쳤다.
그러나 좋은 순간은 잠깐. 이제 성종은 오히려 이게 상인지 벌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수업 계획서를 한 장 한 장 뽑아보며 잔뜩 써있는 강의 내용에 한숨 한 번, 타지에 올라와 대화할 사람도 없다는 걸 알았을 때 한숨 두 번, 그리고 망할 교수가 첫 등교 첫 수업 처음부터 과제를 냈을 때 한숨 세 번. 성종은 대학교는 일종의 벌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내가 너무 예뻐서 하늘이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거야. 거울을 들여다보며 성종은 눈물을 흘렸다. 아… 미인박명이라더니.
조원들끼리 가까이 앉으라는 교수의 지시에 학생들이 왁자지껄 자리를 바꾸는 동안 성종은 입이 댓발 나와서는 발을 구르고 있었다. 대학교가 다 뭐야. 광주로 돌아가고 싶어. 혼자 앉아가지구서는 징징대고 있는데, 성종의 눈앞으로 누군가의 손이 슥슥 휘저어졌다. 모야 이 병신은! 한껏 날카로운(그래봤자 동글동글한) 눈을 만들고서 올려다 본 곳에는 초록색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있었다. 성종이 만든 사나운 눈매와는 비교도 안 되게 치켜 올라간 눈매. 분명 입이 웃고 있는데도 어딘가 인상이 더러웠다. 남자는 손에 들린 종이를 팔랑대더니 성종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남자가 존나 사납게 생겨서 조금 쫄긴 했지만, 깡 하나로 광주 일대를 휘젓던 이쁜이성종이 어디 가나. 성종은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민 채 마주 앉은 남자를 새침하게 쳐다보았다.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바보인가? 어디 좀 모자란 듯? 성종이 머리를 굴리는데,
“안녕하세요!”
그가 쾌활하게, 아주 쾌활하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여…. 성종도 얼떨결에 인사를 받았다. 상대방의 기세에 눌려서 인사를 하긴 했는데. 뭐지?
“우리 과제 같은 조 됐던데요.”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남자가 성종을 한 번, 그리고 자신을 한 번 가리키며 설명했다. 성종은 그제야 아아~ 하는 감탄사로 남자를 반겼다. 근데 발표 과제는 3인 1조 아니었나. 성종이 나머지 조원 한 명을 궁금해 하는 사이 남자는 가방에서 끝없이 무언가를 꺼냈다. 필통, 공책, 교과서. 거기까진 그렇다 치는데 그 이후에 줄줄 따라 나오는 지갑과 안경과 휴대폰과 엠피. 성종이 그것들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동안 남자가 물었다. 신입생이시죠?
네에…. 성종이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은 자신의 책상 위를 보며 대답했다. 미술학부 1학년 이성종이에요. 대답하는데, 어쩐지 깨끗한 책상 위가 이상해보였다. 공책이라도 들고 올걸 그랬지. 성종의 가방 속에는 지갑과 머리빗 하나가 끝이었다. 아, 틴트도 하나 들어있네. 딸기향으로^^
“무용학부 09학번 장동우라고 해요. 2학년.”
그렇구나. 09학번이면 몇 살인지 성종이 손을 꼽으며 계산을 하는 사이 교수는 뭐라뭐라 덧붙이곤 수업을 마무리 지었다. 왜 이렇게 빨리 끝나요? 학생들 조 짜고 발표할 거 주제밖에 안 알려줬잖아요. 성종이 동우에게 물었다.
“으응, 원래 학기 첫 수업은 이래요. 개강의 충격과 공포를 완화하는 기간이죠. 고등학교로 치면 봄 방학이라고나 할까. 솔직히 대학생들, 개강이라고 학교 왔지만 여전히 속으로는 ‘이건 꿈일 거라!’고 생각들 하고 있거든요. 재미난 인간들이죠. 안 그래요?”
동우가 성종에게 재잘재잘 설명을 해주는 동안, 대형 강의실은 나가려는 학생들로 인해 순식간에 혼잡해졌다. 반쯤은 동우의 설명을 듣고 반쯤은 다른 생각 중인 성종은 나가는 학생들을 살폈다. 학생 수가 많으니 확실히 복잡하다. 이따가 나가야지. 성종은 하품을 한 번 하고 자리에 그대로 앉아있었다.
책상에 늘어놓은 게 많은데다 워낙 산만해서 가방 챙기는데 시간이 걸리다보니 동우도 강의실을 나가는 것이 늦어졌다. 주섬주섬 가방에 밀어 넣고 나니 멍하니 앉아있는 성종이 눈에 밟혔다. 후배님 왜 그러고 있어요? 동우가 물었다. 치켜 올라간 눈을 동그랗게 뜨는 모양새가 솔직히 좀 귀여웠다. 금방이라도 물어뜯을 것처럼 생겨가지고는 조근조근 설명을 해주는 것도 괜찮아보였다. 그러니까, 뭐. 첫인상은 마음에 들었다는 거지. 아까 인상 더럽다는 말은 취소다.
“배고파서요.”
성종은 별 생각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대답했다. 그래도 배고픈 건 사실이었다. 동우는 다시 자리에 앉더니 다시 가방에서 이것저것을 꺼내기 시작했다. 분명 아까 사놓은 게 있을 텐데! 아까처럼 필통, 공책, 교과서, 수첩, 안경, 지갑, 엠피, 그리고 무려 모자와 양말(여기서 성종은 잠시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쩌면 속옷도 들어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도 해본다.)까지 나온 뒤에 드디어 동우가 찾던 것이 책상 위로 올라왔다. 아까 등교하면서 급하게 산 샌드위치. 원래는 아점으로 먹으려고 한 건데, 성종에게 양보하는 게 좋겠다.
신입생이라고 신나서 등교했는데 과제가 생겨서 풀이 죽은 모습이 예뻤다. 나는 신입생 때 저랬나. 아닌데. 난 대학교 첫 날, 첫 수업에 숙취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그리고 수업 끝나고 술 마시러 갔는데. ……?
“이거라도 먹을래요?”
엥, 저 주시는 거예요? 성종이 갑자기 등장한 샌드위치에 표정이 환해졌다. 동우가 보는 성종의 복슬복슬한 머리카락 위로는 분홍색 토끼 귀 두 개가 쫑긋 솟았다. 아이 시발 겁나 이쁘네! 빵집에서 2500원 주고 산 샌드위치인데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다. 동우는 같이 먹으려고 산 오렌지 주스도 마저 내밀었다.
먹이를 주는 자에게 성종은 어느 새 마음을 연다. 맛있어요? 묻는 동우의 말에 성종이 처음으로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새 학생들이 다 빠져나간 강의실에서 꽃처럼 예쁜 신입생을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아니, 좋다.
한동안 먹는 데 집중하느라 말이 없던 성종은 오렌지 주스까지 다 마시고는 환하게 웃었다. 아깐 계속 투덜거린 주제에 먹을 것 좀 줬다고 이렇게 태도가 변하다니 스스로도 좀 창피했지만, 뭐 어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원래 뭘 먹어야 다른 일도 잘 돌아가는 법이다. 배가 고프면 계속 밥 생각만 하느라 짐승처럼 된다고 누군가 말했다.
“근데 동우 선배는 왜 저한테 존댓말 하세요? 말 낮추셔도 되는데….”
“아니야요, 저한테 존댓말 쓰는 사람한테는 저도 존댓말 쓸래요.”
제법 격식을 차린 대답에 성종이 살짝 웃었다. 귀여워. 꽃받침 자세를 한 채 마주 앉은 남자를 보는 성종의 눈이 조금씩 빛나기 시작했다. 어쩌면, 대학교가 그렇게 나쁜 건 아닐지도 몰라. 아니, 오히려 아주 좋은 건가봐!
“우리 벌써 과제 다 끝낸 것 같아요!”
“응? 어떻게요?”
“후배한테 존댓말 해주는 선배는 처음이에요. 그래서 선배 너무 좋아요. 언어가 진짜 중요한가 봐요. 그쵸!”
아이, 이쁜 후배님 진짜루 똑똑하네요! 동우가 감탄했다. 헤헤, 하고 성종이 귀엽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얼굴 이쁘단 소리는 귀가 마르고 닳도록 들어왔지만 똑똑하단 칭찬은 처음 들어본다. 우리 엄마도 나한테 똑똑하다구 말 안 해주는데…. 진짜 좋은 사람이야!
“이쁜 후배님, 이제 끝나고 뭐해요? 또 수업 있어요?”
“움, 몰라여. 동아리나 한 번 둘러볼까 하구 있었어요.”
아하하핳 그러시구나~ 성종을 보는 동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렇다면 추천하고 싶은 동아리가 있어요!
그것이 동우와 성종의 첫 만남이었다.
~0~)♥(ㅇxㅇ
울림대학교에는 총학보다 오랜 역사를 가진 동아리가 딱 하나 존재한다. 동아리 이름은 나루. 영어로는 NaRu라고 쓴다. (호원은 그 영어표기를 처음 시작한 것은 분명 허세 가득한 남자 선배였을 거라고 주장한다.) 학번제가 아니라 기수제라서 먼저 들어온 사람이 무조건 선배가 되는 엄격한 동아리인데, 학교 내에서 활동도 없고 연합 동아리도 아니라서 아는 사람만 아는, ‘동아리 홍보 따윈 개나 주라고 해’를 모토로 삼고 알음알음으로 신입생을 받는 동아리이기도 하다. 물론, 그 때문에 학기 초만 되면 재학 증명서를 구하느라 선배들이 진땀을 흘리곤 하지만서도.
동우가 잉여한 성종을 데리고 온 곳이 바로 그 곳, 나루. 무한관 207호 되겠다. 동우가 신입생 시절부터 입부해 있었던 동아리인데. 그렇다면 나루는 무슨 동아리인가? 밴드부? 연극부? 성종이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며 동우에게 계속 물어봤지만, 동우는 애매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정말, 나루는 무엇을 하는 동아리인가…. 그것은 잠깐 접어두고 성종은 어느 새 선배들과의 카드 게임에 폭 빠져있었다. 서양화를 그려보기만 했지 그것으로 게임을 해본 적은 없는 성종에게 카드 게임은 신세계였다. 게다가 선배들은 치킨도 시켜줬다. 먹을 걸 사주는 사람이 나쁜 사람일 리 없다는 판단 하에 성종은 입부 신청서에 이름을 적는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경<개미지옥 입성>축. 세븐 브릿지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무슨 동아리인 줄도 모르고 냉큼 입부 신청서를 쓴 성종은 어쨌든 그 다음날부터 동아리에 부지런히 얼굴 도장을 찍기 시작했다. 지방에서 혼자 올라왔으니 친구도 없고, 학과가 아닌 학부에 입학한 터라 학부 사람들끼리 친하게 지내기도 어렵고. 그나마 성종과 안부를 주고받는 것은 막 번호를 교환하고 정을 붙이기 시작한 동우뿐이었다. 남우현이라는 선배도 귀찮게 하긴 하는데, 성종은 동우 쪽이 더 좋았다. 말이 아닌 문자로 대화해도 한없이 다정하고 밝다. 성종은 동우와의 카톡 채팅방 배경을 분홍색으로 바꿨다. 파란색이 분홍색으로 변한 것뿐인데 채팅방 배경만 보고 있어도 기분이 좋았다. 그냥 막 가슴이 따듯해지는 기분. 입꼬리가 살금살금 올라가고 손끝이 바빠지고. 조금, 설레는 것 같기도 해.
이래저래 따지다보니 성종은 자꾸만 동우와 나루에 정이 들어 결국 입학한지 이주일 만에 나루의 지박령이 되기에 이르렀다. 부장을 맡고 있는 성규가 성종에게 “너 되게 할 일 없구나?” 하고 물을 정도가 되었으니.
동방 소파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있던 성종은 동우가 동방에 들어오자마자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눈치 빠른 우현이 혀를 찼다. 동우의 옆으로 슬슬 엉덩이를 움직여 바싹 붙은 성종은 잠깐 눈치를 보다가 동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 형은 워낙 잘 만지고 치대니까 이래도 괜찮지 않을까?
가지고 있는 용기를 전부 끌어올려서 한 일인데, 동우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성종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서 식은땀이 났다. 허 참, 헤픈 사람일세. 성종의 맞은편에 앉아있던 우현이 ‘나는 다 알아요’ 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음흉한 표정에 심술이 난 성종이 괜히 물었다.
“왜 저 말고 다른 신입생들은 안 오죠? 56기는 저 혼자예요, 설마?”
순진한 성종의 물음에 총무를 맡고 있는 호원이 즉각 대답했다. 호원은 부실 구석에서 성규와 바둑을 두고 있던 참이었다. 성규가 지는지, 앓는 소리를 냈다.
“우리의 존재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면 이 세계의 균형이 흔들려.”
“Aㅏ…”
성종은 그제야 본인이 좀 이상한 동아리에 들어오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원이 전부 남자밖에 없다는 것부터 이상했어…. 대체 나루는 뭘 하는 동아리인가요? 성종이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더욱 불안해졌다.
그 때 성종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이 있으니.
성종이 처음 들어왔을 때 성규가 정해준 것이 있었다. 성규 부장님 가라사대, 호원을 짚으면서 “얘는 너 밥 사주는 선배고,” 그리고 성열을 짚으면서 “얘는 너 커피 사주는 선배고,” 마지막으로 명수를 짚으며 “얘는 아이스크림 담당이다.” 라고 하셨다. 그럼 난 뭔데요. 우현이 실실 웃으면서 묻자 성규가 웃으며 대답했다. 너랑 나는 춘천 담당이다.
춘천? 춘처언??? 그 때는 그냥 ‘싱거운 농담이네ㅇxㅇ-3’ 하고 넘어갔는데 생각해보니 그건 일종의 실마리였던 것 같다. 춘천이랑 나루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설마 춘천까지 가서 원양어선에 팔리는 건가? 인신매매 동아리인가 시발!
“들어올 땐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
호드립에 대한 성종의 쟈가운 반응을 눈치 챈 우현이 성종을 위로했다. 다들 그렇게 지박령이 되는 거야.
쓸데없이 결속력이 강한 나루 부원들은 공강 시간을 전부 동방에서 보내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다. 가끔 동방에서 술 처먹고 놀다가 막차가 끊기면 동방에서 자고 가기도 한다고. 그건 사실인 듯, 동방에는 소파와 긴 의자 뿐 아니라 누워서 잘 수 있도록 장판으로 덧댄 곳이 있었다. 장판 구석탱이에 즐비한 10년 묶은 것 같은 칫솔과 베개, 담요까지 확인하고 난 성종은 본인이 대체 어떤 동아리에 들어온 것인가를 한참이나 고민해야 했다. 노숙 동아리? 엠티는 서울역으로 가나요?
어쨌든, 성종이 동방에 꼬박꼬박 출근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인 동우 또한 나루 부원답게 동아리에 최적화된 대학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건 만날 사람이 없어서라든가 심심해서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스레 발길이 향하는, 일종의 습관 같았다. 그래서 성종은 ‘아 오늘은 자취방 청소해야 하니까 꼭 수업 끝나자마자 학교를 떠야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정신을 차려보면 동방에 와 있곤 했다. 동방 문을 열면 저에게 확 쏠리는 반갑다는 눈길들, 또 왔냐는 손짓들 사이에 동우의 것도 있을 게 분명하니까.
“선배는 왜 매일 동방에 와 있어요?”
성종이 어느 날 물은 물음에 동우는 읽던 만화책에서 고개를 들며 웃었다.
“우리 이쁜 후배님이 있으니까요.”
그러면 성종은 나루의 정체가 대체 무엇인지 생각하다가도 동우의 대답에 좋아 죽는 것이었다. 그렇게 또 나루의 정체에 대한 고민은 멀어지고…☆
~0~)♥(ㅇxㅇ
동우와 성종이 같이 듣는 교양 수업은 발표 수업을 시작했고, 다음 주에 둘의 발표 일정이 잡혔다. 상황이 더 잘 이해되도록 짤막한 상황극 같은 거 넣을까요? 그럼 대본도 만들까요? 둘 치고는 드문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잘 굴러가나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아무리 과제에 관련된 내용으로 말을 시작해도 자꾸만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다. 상황극이요…? 진짜 무대 올리는 것처럼?
“아, 무대 얘기 하니까 생각난 건데요, 저는 춤 잘 추는 사람이 그렇게 좋더라구요. 진짜 멋있어요. 섹시하기도 하구.”
“아 진짜요? 저는 이쁜데 특이한 사람이 좋아요.”
누가 보면 소개팅을 한다고 착각했을, 지나치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느라 시간이 존나 오래 걸리긴 하였으나…. 그래도 중간중간 집 나간 정신줄 붙잡아가며 한 보람이 있어 발표 준비가 끝나긴 끝났다. 벌써(?) 어둑해진 창 밖 거리에 성종이 한숨을 쉬었다. 오늘 저녁은 또 뭐 먹나. 아침에 내가 뭘 먹었더라. 아니, 아침밥 같은 거 먹지도 않았구나.
차가운 창에 뺨을 대고 성종은 시무룩해졌다. 창에 손바닥 자국을 찍는 모습이 귀여웠다. 가방을 챙기던 동우가 동작을 잠시 멈추고 눈을 끔벅였다. 지방에서 올라와서 혼자 자취를 한다고 들었다. 과에 친구도 별로 없는 모양이던데, 그래서 심심해하는 걸까? 오늘따라 동아리 방에 선배들도 없고. 아마 그래서 풀이 죽은 걸 거야.
동우는 조용해진 성종에게 용기를 내서 말을 걸었다. 성종이, 이쁜 후배님!
“호원이는 밥 사주는 선배고, 성열이는 커피 사주는 선배고, 명수는 아이스크림 사주는 선배잖아요. 그럼 술은 내가 사줘도 돼요?”
그 말에 조금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 동우가 반쯤 열린 가방을 품에 안고 묻고 있었다. 집중하면 나오는 버릇인 거 같은데, 입이 점점 벌어진다. 아니 뭐, 원래도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본 적이 없긴 한데. 그래도.
동우의 헤 벌린 입을 보고 성종이 쿡쿡 웃었다. “침 떨어지겠어요!” 그제야 합, 하고 입을 다문 동우의 입술을 성종이 톡톡 두드렸다. 가느다란 성종의 손가락이 동우의 도톰한 입술을 살짝 만지는데 동우는 슬그머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으아, 이러면 안 돼. 마음을 다잡고 성종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늘은 나랑 놀아요.”
동우의 상냥한 말에 차마 싫다고 할 수가 없어서 내밀어진 손을 잡아주었다. “밥도 먹을 수 있고 술도 마실 수 있는 곳으로 가요.” 성종이 그렇게 말하고는 덧붙였다. 근데 저 술 잘 못해요. 고개를 끄덕이며 동우가 자연스럽게 성종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손을 잡고 깍지까지 끼는 동우 때문에 가슴이 두근거리는데, 정작 동우는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어떤 반응을 해얄지 모르겠다. 그냥, 얌전히 잡혀 있으면 되나.
그런 성종의 속도 모르고 동우는 또 삼천포로 빠지고 만다.
“어차피 춘천 가면 술 많이 마시게 될 거예요. 나도 원래 소주 세 잔이 한계였는데 춘천에서 매년 늘리고 온다니깐요!”
동우의 활기찬 설명이 이어졌다. 그 놈의 춘천. 이젠 겁이 나서 못 물어보겠어. 춘천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은 넣어두기로 한 성종이 조용히 대답했다.
“세 잔이라니, 심하네요. 나도 한 병은 마시는데….”
~0~)♥(ㅇxㅇ
춘천에 가서 주량을 늘리고 온다더니, 다 개뻥이었어. 성종은 술이 들어간 후 급격히 사람이 변한 동우를 보며 생각했다. 왜 사람은 술에 취하는 걸까? 왜 술은 사람에게서 이성을 가져가는 걸까? 알코올 같은 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도 됐잖아. 왜 인간이란 존재는… 특히 왜 이 인간은…?
저 혼자 좋다고 키득키득 웃고 있는 동우를 보다가 성종이 한숨을 쉬었다. 집게로 치킨의 살을 헤집으면서 동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고 애를 썼지만, 별로 신통치 못했다. 동우가 지금까지의 연애사를 늘어놓는 동안에는 잠시 딴 생각을 할 정도였다. 니예니예, 23년 살았으면서 참 많이도 만나셨네요. 다른 사람 얘기만 주구장창 늘어놓는 동우가 미워져서 성종은 제 앞에 놓인 소맥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냐. 이건 질투가 아니야. 착잡함이지. 자기 합리화를 하며 동우의 입을 막아버릴 기회를 엿보는 성종에게, 갑자기 귀가 쫑긋해지는 말이 들려왔다.
“…근데 우리 이쁜 후배님보다 이쁜 사람은 본 적이 없어여……”
순간 연애 세포가 빛의 속도로 세포 분열을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는 시들시들 하더니. 역시 인간관계에서 언어의 중요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연애 세포가 마구 자라나는 기분. 소름이 돋는 것과 비슷한 그 느낌에 성종이 눈을 크게 떴다. 그래, 나 역시 예쁘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이건 중요해, 정말.
“정말로 제가 제일 예쁜가요?”
“네? 네…. 사실 처음 봤을 때 쬐에끔 반한 것 같기두 하구…”
“쬐끔? 아, 실망이야. 그거밖에 안 돼요?”
“으하핳하핳! 우리 후배님 애교 없다더니 왜 이렇게 애교 방출하고 그래여. 또 반하겠네!”
원래 시시덕거리는 건 처음이 어렵지 하다보면 그만큼 쉬운 일이 없는 법이다. 더구나 썸을 타는 사이라면. 그 두근두근하고 말랑말랑한, 봄기운에 완연히 취한 사이라면. 그리고 연애의 아군이자 적군, 술이 있다면 시시덕거림은 때로 이름을 바꾸곤 한다. 로맨스라는 이름으로. 알코올의 위대함이란.
주거니 받거니 술잔 대신 서로에 대한 의미 불명의 칭찬이 오갔다. 막차 시간이 슬슬 다가와서 이제 일어나야 하는데. 정신이 없어서 원.
성종이야 음주 경력이 겨우 두 달 된 새내기고, 동우는 원체 술이 약한 편이라 간단한 소맥으로도 이미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다. 그래도 둘 중에 조금 더 정신이 남아있는 성종이 동우를 끌고 일어났다. 형아, 우리 집에 가요. 내일 토요일 아니잖아요.
“흑ㅠㅠㅠㅠㅠㅠ내일이 토요일이 아니라니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멸망해버려라ㅠㅠㅠㅠㅠㅠ”
이상한 이유로 눈물샘이 터진 동우가 울면서 계산을 마쳤다. 이런 것도 귀여워 보이면 이미 끝장인가요? 머리가 소란스러운 와중에도 성종은 좀 풀린 눈으로 동우를 지켜봤다. 진짜 중증인가 봐. 지식인에 물어볼까? 어쩐지 끝이 123으로 끝나는 아이디를 가진 사람이 친절하게 답변해 줄 것 같아….
막차가 아슬아슬한 시간인데 끝은 무슨, 이제부터 시작인 술집들을 보며 동우가 소리 내서 웃었다. 한 30초 정도 웃는 것 같다고 성종은 얼핏 생각했다. 물론 왜 웃는지는 모른다. 그냥 웃나부다… 하고 있을 뿐.
모르긴 몰라도 형이랑 있으면 기분이 좋아요, 하고 말하려는데 동우가 성종을 덥썩 안아왔다. 망설임 없이 허리를 감고 몸을 맞댄다. 아 어지러. 세상이 빙빙 도네. 아까부터 어질어질 하던 것이 심해져서 성종은 동우를 마주 안았다.
“형아, 집에 갈 수 있어요?”
“네, 이쁜 후배님 집 갈 수 있어여…”
아니요, 우리 집 말구요. 형아네 집이요…. 대답하려던 성종은 입을 다물었다. 알코올의 존재 이유에 대해 또 다시 고뇌할 시간이다. 한숨.
~0~)♥(ㅇxㅇ
다음날.
눈을 뜬 동우는 처음 보는 곳에 와 있어서 소스라치게 놀랐고, 제 품 안에 성종이 안겨있는 것을 보고 더 놀랐고, 왜인지 모르겠지만 다 벗고 있어서 더더욱 놀라는 바람에 성종을 깨우고 말았다.
“후배님ㅠ.ㅠ 일어나보세요!”
반쯤 깨어 흐릿한 시야를 닦아내는 성종을 동우가 흔들었다. 으으, 10분만, 아니, 5분만 더어…. 칭얼거리던 성종은 이것이 동우의 목소리임을 깨달았다. 어?!!? 왜 동우 형?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 성종이 눈을 비볐다. 어제 정신없는 와중에도 양치질은 하고 잤나보다. 역시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야. 생각보다 텁텁하지 않은 입 안에 안도를 느끼며 성종이 입맛을 다셨다. 어젯밤의 일들이 께느른히 생각나기 시작했다. 다는 아니고, 집에 도착했을 즈음 까지.
그렇지, 어제 내가 동우 형을 여기로 데려왔지. 그런데 어떻게 됐더라. 현관문을 들어선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가 텅 비었어. 약간 지끈거리는 머리를 쓰다듬으니 그제야 동우가 눈에 들어왔다. 당황한 표정을 지은 동우가. 불안해하는 동우가. 이불로 몸을 가리고 있는 동우가. 아…무…것……도 입지 않은 동우가.
왜죠?
알 수 없는 위기감이 몰려온다. 아, 아닐 거야. 그렇지 않을 거야. 설마. 미친 이성종, 너 설마 20년의 순결을 해제했니?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두려움을 느낀 성종은 제 몸을 덮은 이불을 들어 올려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늘씬하게 뻗은 제 두 다리가 보였다. 맨 끝의 두 발. 종아리. 타고 올라와서 허벅지.
그리고 바나나.
날 것의, 맨살의 바나나…….
“어… 음……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간밤에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어요, 혹은 간밤엔 아무 일도 없었어요, 등등 할 수 있는 말이 무척 많았는데 당황한 동우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거였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우리 함께 추측해봅시다. 뭐 이런 건가.
동우를 마주보는 성종의 두 눈이 핑글, 예쁜 코가 훌쩍, 도톰한 입술이 질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에 동우가 다급히 성종의 어깨를 잡았다. 물론 동우는 위로해주려는 순수한 의도였겠지만 지금 여기서 순수한 건 아무 것도 없어. 방구석 먼지조차 에로하단 말이야.
“손 떼요! 어딜 만져, 이 변태가!!ㅠxㅠ 어쩔 거예요 내 순결!!!!!”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베개로 동우를 두들겨 패기 시작한 성종 때문에 동우는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았다. 간간히 “아니에요! 아니에요! 하지 마요!” 하는 소리를 내보았지만 그게 통할 리가.
먼지가 날려 재채기가 나올 정도로 베개를 휘두르던 성종이 문득 이상한 표정을 해 보였다. 나는 시방 기분이 겁나게 거시기하당께. 대충 그런 얼굴이었는데, 동우는 또 베개가 날아올까 무서워 웅크리고 있느라 그 표정을 미처 보지 못했다.
흠씬 두들겨 맞고 얼이 빠진 동우를 등진 채 성종은 여기저기 떨어진 옷을 모아 주워 입었다. 발에 동우의 속옷이 채이기에 집어다가 동우에게 던져주었다. 얼굴로 속옷을 받은 동우가 얼굴에서 속옷을 떼어내고 푸하- 하고 숨을 쉬었다. “그 덜렁거리는 것 좀 어떻게 해봐요. 에그 망측해라!” 성종이 제 눈을 가리며 핀잔을 주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우물쭈물하던 동우가 속옷을 꿰어 입었다. 내 프라이드를 보고 망측하다니… 이쁜 후배님 너무해…….
옷을 주워 입으며 제정신도 장착한 성종이 저기압의 영향으로 인해 퉁퉁 부은 뺨으로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동우를 등지고. “후배님 뭐해요?” 동우가 말을 붙였지만 성종은 대답이 없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정말 모르는 거야? 성종은 화가 나서 주전자 안에 보리를 던져 넣었다. 순결 어쩌구가 중요한 게 아냐. 아니,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고… 여튼 그보다 더 중요한 말이 있는데. 눈치도 없어.
보글보글 소리를 내며 보리차가 끓여지고, 성종은 여전히 동우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빨래 통을 뒤적였다. '난 말 안 걸 테니까 형이 알아서 해요ㅇx"ㅇ' 하고 조그만 등짝이 말하고 있었다. 아 나 진짜로 말 걸면 안 되는 건가? 성종이 툴툴대면서 쥐어준 보리차를 마시며 동우가 눈을 굴렸다. 그치만 보리차도 마시라고 줬는걸. 그렇게까지 화가 난 건 아닐 지도 몰라.
성종은 동우가 없다는 듯 세탁기를 돌리더니 이제는 이를 닦고 있었다. 성종이가 화장실에서 나오면 바로 얘기 해야지. 보리차가 든 컵을 만지작거리며 동우는 다짐했다. 방 안 여기저기에 떨어진 제 옷가지 위로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성종과 껴안고 잠들어 있었던 이부자리가 엉망이다. 방금 전까지 저기서 다 벗고 껴안고 있었단 말이지…. 좀 야하네.
“있잖아요, 이쁜 후배님….”
마른세수를 하던 성종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를 막 비벼서 그런지 뺨에 속눈썹이 묻어있었다. 어쩜 이런 모습도 예뻐요? 묻고 싶지만 지금 말하면 존나 혼나겠지.
“어젯밤이 조금 기억이 난 거 같은데요…… 제가 한번 설명해 보겠습니다.”
성종이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손을 올려 뺨을 털어주며 동우가 말을 이었다. 긴장 되네 이거.
그러니까 내일이 토요일이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한 동우가 세상 멸망해버리라며 울었던 부분부터 시작하자. 성종은 대중교통을 이용하자고 말해보았지만 동우는 택시를 타고 가야한다고 울먹였다. 그래서 성종이 그래요, 그럽시다, 그러니까 제발 갑시다, 하고. 택시 정류장으로 향하는 성종을 동우가 또 붙잡았다. “택시 기사님ㅠㅠㅠㅠㅠㅠ고생하시는데ㅠㅠㅠㅠㅠ카드 안 돼요 현금 드려야 해여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장동우. 이런 남자였던가. 성종은 술에 취해 엉엉 우는 와중에도 ATM 기계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동우에게 질질 끌려갔다. 결국 편의점에 들어가 현금을 찾고 성종의 입에 사탕까지 하나 물려놓은 다음에야 동우는 택시를 탔다. 택시를 타고 상념에 잠겨 사탕을 쪽쪽 빠는 성종의 어깨에 기대어 동우는 잠들었고, 성종은 저보다 무거운 동우를 끌고 엘리베이터도 없는 맨 꼭대기 층까지 낑낑 올라왔다.
눈도 제대로 못 뜨는 동우를 눕혀 놓고, 분명 성종은 양치질을 하고 양말만 벗은 채 매트리스에 누웠다. 혼자 자던 곳에 둘이 눕자니 조금 좁긴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원래 성종은 술을 마시면 곱게 잠든다. 고주망태가 될 때 까지 마셔본 적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게 잠들고 새벽 세 시. 동우가 불현듯 눈을 떴다. 장동우로 말할 것 같으면, 평소엔 잠들면 업혀가도 모르는데 이상하게 술에 취하면 꼭 새벽에 깬다. 새벽에 깨어나서 별 일을 하는 건 아니고, 그저 상당히 세심해진다. 이를테면, 그 전에는 한 번도 한 적 없는 마스크 팩을 한다든가, 불현듯 방을 치운다든가. 그런데 이번 새벽에는 좀 더웠는지, 옷을 벗었다. 세심하게 셔츠를 벗고, 바지를 벗고, 티셔츠를 벗고, 속옷을 벗고… 속옷까지 벗은 건 아마 지나치게 세심하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제 옷을 다 벗고 나니 옆에서 끙끙거리며 자는 성종이 눈에 들어왔다. 술기운 때문인지 얼굴이 붉었다.
“…성종이도 더운가 보네.”
네, 그러므로, 결론을 말하자면,
“어젯밤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ㅡxㅡ?”
“믿어주세요!”
“그럼 왜 우리 둘 다 ‘전부’ 벗고 있는데요.”
“그거는 후배님이 더워 보여서… 그리고 저도 더우니까……”
“더워 보인다고 발가벗겨서 품에 안는 게 말이 돼요?;; 큰일 날 사람이네 이거.”
“옷을 벗긴다는 데에 너무 집중하다 보니까 어느 새 팬티를 벗기고 있었을 뿐이라구요!”
지나가는 사람 뺨 때려놓고 심심했다고 할 건가요. 달리는 차 앞에 뛰어들어놓고 스릴을 즐기자고 할 건가요. 잠깐 동우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던 성종은 등을 돌리고 방 여기저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동우가 벗어던져놓은 셔츠며 바지를 개키는데, 조그맣고 가냘픈 어깨가 축 쳐져서는, 어휴. 저걸 자신이 저렇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니까 동우는 또 나름대로 죄책감이 밀려왔다. 아, 나쁜 손. 내가 왜 옷을 건드려가지구. 왜 옷을 벗겨가지구. 왜 벗기기만 해가지구 이럴까. 아예 진짜 사고를 쳤으면 당연하다는 듯 말뚝이라도 박을 텐데.
첫날밤에 각시 옷고름을 풀기 위해 다가가는 신랑도 지금의 동우만큼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릎걸음으로 슬쩍 성종의 등에 바짝 다가갔다. 등짝을 보자. 아니, 옷을 입었으니 등짝은 못 보겠고, 목덜미라도 볼까. 흰 목덜미가 보고 싶어서 목덜미를 덮은 성종의 머리카락을 후후 불었다. 목덜미에다만 이러면 재미없나. 귀에도 바람 좀 불어줄까. 귓가에 후우, 하려는데 성종이 일어서버린다. 형은 진짜 바보야ㅇxㅜ귀찮게 하지 말아요. 서러운 반응이 톡. 그래도 동우는 또 졸졸 따라간다. 작은 자취방 안에서 갈 데가 어디 있다고. 성종은 동우를 피해서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결국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꼭 뒷동산처럼 둥글게 솟은 이불을 바라보다가 동우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시작하고 싶지 않았는데ㅠ.ㅠ
이쁜 후배님, 성종아아- 미안해요. 형아가 잘못했어요. 성종이 몸을 숨긴 이불 위를 토닥이니까 성종이 이불 밖으로 고개를 빠끔 내민다. 눈이 마주쳤다. 이쁜 성종이, 형이 잘못했어요. 형이 바보예요. 그렇지요? 그러니까,
“책임지라면 그리 하겠어요.”
책임을 진다구? 바보. 내가 그런 말이 듣고 싶은 줄 알아. 알몸도 본 마당에 무에 그리 용기가 부족하담. 성종은 삐쳐서 도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더니 고새를 못 참고 다시 나온다. 엄마 잃은 강아지처럼 낑낑대는 동우의 표정이 측은지심을 자극한 탓이다.
“됐어요. 내가 여자도 아니구….”
“그래도 책임지게 해주세요. 이대로는 내가 마음이 안 좋아요.”
정말로 미안해하는 동우 때문에 성종은 오히려 더 난처해졌다. 분명히 아까 당황하고 화가 났던 것은 맞다. 고백도 못 받았는데 순결을 빼앗겼나 싶어서. 그렇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성종은 여전히 기억이 안 나는 상태지만 몸이 아프지도 않고, 섹스를 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고. 그리고 또 설마 동우 형이 제게 거짓말을 할까. 그냥 이쯤 용서해 주기로 하자. 오늘 고백받긴 틀린 것 같다. 이 멍청이. 그렇게 좋게 넘어가려는데….
그런데 장동우는 그게 아닌가봐.
“으… 내가 책임질 거예요!”
“예?”
“책임진다! 책임진다고! 내가 우리 이쁜 후배님 책임지고 말거라구요!!!”
아침나절에 갓 술이 깬 상태로 무슨 용기가 그리 있었는지, 아니면 술이 덜 깼는지. 동우는 주먹을 불끈 쥐고 아예 쐐기를 박았다.
“장동우가 이성종 인생 책임질 거예요!”
조용한 가운데 눈싸움을 하다가, 성종이 먼저 미소를 지었다. 정확히는,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어. 그렇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아요. 아니, 좋아요. 마주보며 눈을 빛내는 성종의 뺨을 양 손으로 폭 감싸고 동우가 웃었다. 이거 되게 부끄럽다. 근데 좋다. 동우의 손 위로 성종의 손이 올라왔다. 봐, 아까 그랬지. 지금 여기는 방구석 먼지조차 에로하다고.
뺨의 솜털이 다 보이도록 가까워졌다. 아, 정말 예쁘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조금 더 가까이 갔다. 숨이 닿는다. 눈을 감을까 말까. 망설이는데 입술이 아니라 이마가 맞닿았다. 이마를 마주대고 눈은 내리깐 채 숨길만 섞였다.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간지러워. 조금 촉촉한 입술이 닿았다고 생각했을 때,
이제 애인님이라고 불러도 돼요? 동우가 천진하게 물었다.
~0~)♥(ㅇxㅇ
동우는 후에도 여러 번 그것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다고, 자신도 그 때는 술에 취해서 인사불성이었다고 주장했지만(그걸 전해들은 성규는 코웃음을 쳤다.) 사실 3인 1조로 발표해야했던 과제의 마지막 한 명의 조원은 성열이었고, 성종이 겁나 마음에 든 동우가 성열에게 하여금 수강 정정을 하도록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복학생에게 낚인 신입생’ 공식의 효력 또한 공공연한 사실로 밝혀졌다. 그리고 성열은 그 후로도 종종, ‘무용학부 여학우와 소개팅을 시켜주겠다’는 동우의 약속이 이행되지 않고 있다며 투덜댔다.
~0~)♥(ㅇxㅇ
데이트? 그게 뭐죠. 먹는 건가요. 제대로 데이트도 못 해봤는데 벌써 4월. 두 사람이 평범한 커플과 다를 것 없는 달콤한 연애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시험 기간이 다가왔다. 동우는 춘곤증을 앓느라 입맛도 없고 기운이 없는 성종을 위해 요리를 시작했다. 그래봤자 계란말이에서 고무 맛이 나는 정도의 소박한 실력이었지만. 시험이 끝나고 꽃이 만개하면 같이 무한관 뒤편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놓고 밤새 준비한 도시락을 쨘, 내놓는 것이 동우의 목표였다. 그 전까지는 연습, 무한 연습뿐이다.
오늘의 연습 도시락은 디저트 종류. 누나에게 마이너스의 손이라는 구박까지 들어가며 오븐 사용법을 익혔다. 불이 날지도 모르니 꼭 옆에 소화기를 두고 있으라는 누나의 비아냥거림을 무시하고 천신만고 끝에 완성한 오늘의 메뉴는, 브라우니.
뭐냐 이건? 동우가 펼쳐놓은 도시락 통을 본 우현이 주위를 맴돌더니 동우가 뚜껑을 열자 탄성을 질렀다. 이야, 이거 브라우니잖아. 니가 만든 건 아니겠지. 의심의 눈으로 쳐다보는 우현의 손등을 동우가 한 번 찰싹 때렸다. 미친놈아 너 먹으라고 만든 거 아니야. 동우가 성질을 내거나 말거나 우현은 벌써 하나를 집어 먹어버렸다. 멍멍이 같은 눈매가 더러워졌다.
“맛있어?”
“아니.”
존나 단호하시네요. 단호박이세요? 단호한 대답에 궁금증이 생긴 성규가 저도 하나를 집어먹었다. 그리고는 안 그래도 작은 눈이 더 작아진다. 야 이거 좀 심하게 탔,
“맛있겠다!”
어느 새 동우의 곁으로 바짝 붙어 앉은 성종이 손뼉을 쳤다. 맛있겠죠! 동우가 성종의 손을 마주잡으며 같이 눈을 빛냈다.
애인님, 아~ 해보세요, 하고 동우가 입을 벌리는 시늉을 했다. 성종은 한 치의 의심 없이 아기 새 마냥 입을 벌린다. “아휴, 고래도 들어가겠어요!” 동우의 칭찬에 성종이 입을 벌린 채로 하핳, 하는 소리를 냈다. 아주 웃음소리까지 닮아가는 구나. 성열은 말없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분을 삭였다. 평소 같으면 당장이라도 끼어들어서 고나리를 하겠지만 지금은 시험 기간이다. 군 입대를 미뤄놓은 성열에겐 시험 하나하나가 아주 중요했다. 이번 시험 무조건 3.5 이상 떠야 되는데 저 시부랄 것들이! 성열은 어떻게든 과제에 집중하려 했지만 키보드 위를 달리던 손은 멈춘 지 오래다.
성열이 복식 호흡을 하며 심신의 안정을 꾀하는 사이 동우는 브라우니 한 조각을 성종의 입 안으로 쏙 넣었다. 그리고는 자기가 먹는 것도 아니면서 성종을 따라 입을 우물우물 거린다. 성열이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우현은 빛의 속도로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아직 수업 시간까지는 좀 남았지만 더 이상 여기에 있다간 멘탈이 파.개. 될 것 같다.
“또 주세요.”
“맛있어요?”
“네. 매일 먹었으면 좋겠어요.”
“학점 3.0 넘으면 또 만들어줄게요.”
“정말요? 근데 3.0은 어려운데ㅠxㅠ”
"아니에요~.~ 우리 애인님 이쁘니까 잘 할 수 있어요."
“씨발 그만해!!!!!!!!!!!!!!!!!!!!!!111”
열이 머리끝까지 뻗친 성열이 컴퓨터 키보드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결연한 그 자세에 놀라 누운 채로 귀를 후비던 성규는 그만 깊숙한 곳을 찌르고 말았다. 아 존나 아파.
“미친, 학점이랑 이쁜 거랑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그 브라우니 탔어! 이성종 머리 나빠! 동우 형은 요리 못하고! 왜 둘만 몰라!!!!”
성열의 기세에 놀란 동우와 성종이 그대로 굳은 채 성열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눈도 큰 것들 둘이 땡그랗게 저러고 있으니 눈알이 굴러 나올 것 같다. 그럼 시신경도 같이 딸려 나오겠지. 자, 시신경의 구조는…. 호원은 기-승-전-시험공부로 다시 책 속으로 빨려들어 간다.
"힝ㅠxㅠ 성종이 머리 나빠요?"
"아니에요! 성열이가 멍청해서 그래요. 우리 애인님은 이뻐서 공부도 잘해요."
그러자 성종이 언제 울상을 지었냐는 듯 활짝 웃는다. 형아도 요리 잘해요! 그 평화로운 대화에 성열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성규가 해탈한 듯 눈을 감았다. 성종이를 잡아두기 위해 그 날 치킨을 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었을까. 생각해본다.
아, 죽이고 싶다. 솔로로 만드는 마법 같은 거 개발하고 싶다. 가방은 다 챙겼지만 휴대폰 충전이 덜 되어 동방을 빠져나가지 못했던 우현이 탄식했다. 왜 난 저번 소개팅에서 만난 그녀를 차버린 걸까. 나름대로 귀여웠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잠시 미쳤었나 보다. 다시 연애를 할 기회가 온다면 절대로 놓치지 않을 거야. 아니지, 지금 나가서 만나는 첫 번째 여자에게 사귀자고 말할 거야. 남우현, 그 정도는 할 수 있는 남자야.
우현이 손을 떠는 사이 수업이 끝난 명수가 동방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풍기는 달콤한 냄새에 명수가 코를 킁킁댔다. 빵 냄새 나는데? 약간 뭉그러진 발음으로 부원들을 떠본 명수는 곧 동우의 브라우니를 발견했다. 브라우니 옆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이마를 부비는 컾등이는 못 본 척 했다. 그게 최선이었다. 확실하다.
“먹겠음.”
먹고 싶다는 의사표현을 했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그럼 먹어야지. 명수는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맑은 눈으로 브라우니를 보았다.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뱉어냈다.
동우가 성종의 눈가를 따라 손으로 덧그리는 바람에 간지럼을 탄 성종이 꺄르륵 웃고, 중간고사가 다가온다. 아무도 공부하지 않는다. 씨발, 공부를 할 수가 없다. 애초에 동방에서 공부를 하겠다고 하는 그 생각부터가 글러먹었다. 그렇게 나루 부원들의 하루가 또 흘러간다. 이번 시험은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이게 다, 장동우랑 이성종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