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6
병간호하는
밥은 어떤 방법으로 죽이 되는가? 성종은 끓고 있는 냄비를 망연히 내려다보았다. 분명히 쌀밥을 물과 함께 끓이면 된다고 했던 것 같은데, 밥은 까짓 끓는 물 좀 만난다고 쉽게 죽이 되어주지 않았다. 아니, 이게 아까보다 끈적끈적해진 것 같긴 한데 여전히 죽보다는 밥에 가깝다고. 대체 얼마나 더 끓여야 해?
힐끗 내다본 거실 소파에선 동우가 소설을 읽고 있었다. 흘러내린 안경을 치켜 올리는 모습에 성종은 그만 서러워졌다. 내가 저런 남자한테 죽 하나도 못 끓여주다니. 혹시나 싶어 들여다본 냄비 안에는 여전히 죽이 아니라 밥이 있었다. 미치겠다. 너 대체 뭐가 문제니. 왜 죽이 되지 못해.
죽을 만드는 방법을 잊은 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을 잊은 기분으로 가스레인지를 껐다. 미안, 형아. 죽은 나 말고 본죽 아주머니가 맛나게 끓여주실 거야.
주섬주섬 외투를 입고 목도리를 두르는데 저를 빤히 바라보는 동우와 눈이 마주쳤다. “모자라는 재료가 있어서.” 대충 둘러대는 말에 동우가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까부터 계속 배 안 고프다고 말하는데 왜 안 들어주는 거야.”
“이건 이제 나 자신과의 싸움이거든.”
비장하게 말하며 성종은 외투 주머니에 카드를 쑤셔 넣었다. 진짜로 성종 자신과의 싸움이다. 어떻게든 이 집의 부엌에 죽을 소환하고 말겠다는 의지는 식탁보다 굳건하고 냉장고보다 냉철하며 가스불보다 뜨거웠다.
소설가라서 집에서 일하는 동우와 달리 성종은 꼬박꼬박 출근을 해야 한다. 최근 회사 일이 바빠서 며칠 돌봐주지 못했더니 그 사이 동우가 감기에 제대로 걸려버렸다. 당장 달려가 안아주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우리가 연애를 못하는 이유는 다 회사 때문’이라던 우주 선배의 말이 야근하는 성종의 머리에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결국 한숨 돌리는 시기가 되어 동우의 집으로 달렸을 땐 동우는 혼자서 어느 정도 감기를 치료한 상태였고, 그리하여 성종은 지금 죽에 집착하는 중이다. 괜한 죄책감이라는 것을 알지만 정말, 성종은 뭐라도 해주고 싶었다.
사흘간 먹어도 될 만큼의 죽을 사서 돌아오니 동우는 침실로 자리를 옮긴 채였다. 책에 집중하는 것을 확인하고 부엌으로 달려가 냄비에 죽을 옮겨 담았다. 완전범죄야. 스스로 기특해하며 남은 증거품도 끔살했다. 아 이젠 나두 쉬어야지! 성종은 3대간 내려온 유언을 이뤄낸 사람마냥 홀가분한 마음으로 동우의 침실 문턱을 넘었다.
동우가 성종의 입장과 동시에 몸을 움직여 성종이 누울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동우의 체온으로 따스한 이불 속에 파고들자 아드레날린이 멈추고 쌓였던 피로가 몰려왔다.
“피곤해?”
“피곤해!”
꼬물꼬물 파고들어 동우의 허벅지를 베개 삼은 성종은 정말로 피곤해보였다. “죽 먹을래? 내 애인이 우리 집에 죽 사다놨는데.” 태연히 말하는 동우는 뭐가 좋은지 웃는 낯이었다. ……미아안. 동우의 배에 코를 박고 성종이 꺼져가는 목소리로 사과했다. 동우가 책의 부드러운 모서리로 성종의 뒤통수를 긁었다.
“병간호 필요 없다니까.”
“죽이라도 끓여주고 싶었는데.”
“죽도 필요 없고.”
“난 한심한 애인이야.”
“난 병간호가 필요 없는 애인이지.”
“난 한심한 애야.”
읽고 있던 책을 소리 나게 덮은 동우가 성종을 끌어당겼다. “그럼 난 그 한심한 애의 애인을 할래.” 허리께를 꼭 잡았던 손이 슬금슬금 올라가 성종을 간지럽혔다. 성종이 간지럼을 이기지 못하고 꺄르르 웃었다. 아, 오늘 일어나서 처음으로 웃는 것 같다. 이쯤 되니 누가 누구를 병간호해주는 건지 헷갈린다. 분명 돌봐주러 온 건데 돌봄을 받느라 바쁜 저녁이 되었다. 웃으니까 더 예뻐지는 얼굴에 동우가 제 얼굴을 가까이 했다.
“벗겨줘.”
동우의 말에 성종이 방긋 웃고 먼저 제가 입은 티셔츠를 벗어던졌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언컨대, 오늘 일어나서 한 일 중에 제일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 더 즐거워질 예정이고. 홀라당 발라당 벗어제끼고 동우가 입은 옷까지 해제시키려고 하는 성종의 손은 아까 죽을 만들 때와는 달리 활력이 넘쳤다. 아까까진 멍하던 눈동자가 그야말로 별처럼 반짝였다. 올라타서 작업을 진행하는 성종의 손을 동우가 잠시 붙들었다.
“난 안경 벗겨달라고 한 건데.”
“…….”
“근데 이것도 나쁘지 않네.”
성종에게 깔린 채로 동우가 신나게 웃었다. 그런 동우를 성종이 곱게 흘기다가 잡힌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환자는 가만히 누워서 예쁨이나 받으세요. 여러 겹 꼼꼼히 챙겨 입은 동우가 춥다고 볼멘소리를 뱉을 때까지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