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막대과자 안 나눠먹는
늦는다. 성종은 식어가는 레몬티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레몬이 성종의 눈빛에 겁을 먹었는지 미동도 없이 떠있었다.
동우가 약속 시간에 늦는 경우는 흔하다. 보통은 잠이 너무 많아서 제 시간에 못 일어나는 것이 원인이고. 하지만 오늘은 내가 직접 전화해서 깨웠는데. 제대로 일어나서 밥 먹는 것도 확인했는데! 설마 그 뒤에 또 잠들었나. 레몬을 노려보는 성종의 눈매가 더러워졌다. 레몬이 스스로 몸을 비틀어 즙을 짜냈다.
보통 같으면 좀 늦나보다 하고 말았겠지만, 지금 성종은 커플들로 가득 찬 카페에 앉아있었다. 아, 안 돼. 공공장소에서 빼빼로 게임 하지 마!
반시간을 더 기다리고 성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 시간에서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전화도 안 받고. 오늘은 절대로 안 늦을 거라고 약속하던 동우의 목소리가 귀에서 멀어져갔다. 빼빼로 데이니까 기대하라고 계속 바람 잡던 모습도 생각나 피식 웃었다. 요리든 조리든 먹을 것 다루는 것에는 취미가 없는 성종과 달리 동우는 뭐든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빼빼로도 만들 수 있어요? 무심코 던진 질문에 동우는 단언했다. ‘만들어볼게요!’
그런데 왜 늦는가. 한숨이 절로 나왔다.
휴대폰을 꼭 쥐고 동우의 집 쪽으로 걸어가는데 뭔가가 헐레벌떡 성종을 지나쳐 뛰어가다 멈춰 섰다. 어이구, 오랜만에 뵙네요.
“애인님!”
성종을 발견한 동우가 비명을 질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돌아봐서 성종은 일단 동우를 끌고 골목으로 들어갔다. 죄지은 새새끼마냥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동우는 말을 못 멈췄다. 애인님, 제가 늦었죠. 와 나 진짜 엄청 늦었어! 애인님 많이 기다렸지요? 제가 막 전화도 안 하구 받지도 못하구 막, 막, 정말루 정신이 없었어요. 부엌이 완전 엉망진창 돼서 여기저기 부스러기 다 흘리고! 너무너무 미안해요. 근데 애인님……
아 시바, 성종은 동우의 입에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요점만 말하세요.”
“오늘… 오늘 빼빼로 만들어주려고 했는데요…”
동우가 쭈뼛쭈뼛 운을 뗐다. 눈만 깜빡이는 성종의 앞에서 동우는 점점 작아졌다. 실패했구나? 척보면 딱이지. 성종은 혀를 찼다. 동우는 뭐든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만 뭐든 만드는 것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아, 이거 그런 건가. ‘잘하진 않지만 포기하지 않을 거야.’ 도전정신은 멋지지만 성공할 확률도 높으면 참 좋을 텐데요.
동우의 눈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며 어딜 바라볼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 애인은 귀엽고 헌신적이고 바보야. 성종은 현실을 직시했다. 그러니까 빼빼로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 바람에 약속에 늦은데다 부엌도 엉망으로 더럽혔으면서 정작 빼빼로 만들기에는 실패했다 이거 아냐. 불어오는 바람보다 싸늘한 목소리로 성종이 뒷말을 재촉했다.
“그래서요.”
그래서요, 아이 참, 어디 갔지?! 입고 있는 옷의 모든 주머니를 뒤지는 동우를 성종은 황망히 바라보았다. 분노 게이지가 차오르는 느낌인데. 동우는 외투 주머니를 뒤적이다가 그 안의 셔츠를 더듬고, 바지 앞주머니, 뒷주머니까지 자체 스캔했다. 이 정도로 화내지는 않겠지만 좀 실망한건 사실이었다.
“대신에… 이거를 샀거든요.”
무심히 동우의 손을 봤다가 앓고 있던 모든 화가 증발해버렸다. “어제 통화할 때 애인님이 기침을 하는 것 같아서…….” 끝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성종은 동우의 손 위에 고이 얹힌 감기약을 집어 들었다. 미묘해지는 성종의 표정을 보며 동우가 슬슬 뒷걸음질 쳤다. 망했어. 난 바보야.
한참 감기약을 쥐고 있다가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언제 저기까지 갔는지 다섯 발자국은 떨어진 동우에게 손짓했다. 동우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이리 와요.”
“왜요오….”
“아 쫌!”
“저한테 화내려구 가까이 오라는 거잖아요!”
이젠 거의 울 것 같은 동우를 보며 성종이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쿵쾅쿵쾅 발을 구르며 동우 쪽으로 걸어갔다. 바닥이 부서질 것 같아! 곧 내 멘탈도 그렇게 부서지겠지. 동우는 울상을 한 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성종이나 동우나 온화한 성격이라 화를 잘 안 내지만, 일단 한 번 화를 내면 아주 무섭다. 눈을 질끈 감고 무자비한 질타를 기다렸다.
겁을 사탕처럼 집어먹고 서있는데 얼굴을 가린 동우의 손등에 무언가가 닿았다. 그리고 몸을 감싸는 가냘픈 포옹. 손가락 사이로 눈을 뜨자 성종과 눈이 마주쳤다. 성종이 동우의 손등에 다시 뽀뽀했다. 그 보드라움에 머쓱하게 손을 내려 성종을 마주 안았다.
“안아주려고 그랬어요.”
“네에…….”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드러난 뺨에 뽀뽀해주고 붉어진 눈가에도 뽀뽀했다. 이제 좀 나아요? 진정됐어요? 표정이 편해진 동우를 성종이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금방 좋다고 웃는 동우의 귓가에 성종이 한 번 더 소곤댔다. “고마워요.” 잠깐 망설이다 한마디 덧붙였다. “사랑해요.”
약보다는 이 애정이 감기를 낫게 할 것 같아요. 마구 자라나는 사랑스러움에 예고 없이 또 뺨에 입술을 부볐다.
손을 잡고 흥얼거리면서 길을 걷다가 뭔가가 떠올랐다. 성종이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동우의 귓가에 가림막을 만들어 속삭였다.
“형아가 주는 빼빼로 먹을래요. 먹고 싶어요.”
“응? 빼빼로 없다니까요.”
“왜 없어요. 끝에서 우유 나오는 빼빼로 있잖아요.”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