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1

첫사랑 T ~ W

연우∞ 2014. 5. 21. 16:31




김성규 이성종 장동우


첫사랑








T.



  2010년의 초여름. 원래는 전주로 가는 기차의 차창 앞에서 손을 흔들었어야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져서 나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걸었다.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또 전부 바빴다. 골목길을 걸으면서 조용히 우는 열여덟 살 남자애에게는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사람들의 무관심이 고마웠다. 이제 며칠이 지나면 6월 9일이고, 그러면 그 날 부터는 사람들의 관심을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에는 차가운 무관심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닦아내지 않으니까 눈물은 그냥 주르륵 흘러서 뺨이 아릿할 때 까지 새어나왔다. 눈물방울들은 배를 감싸 안은 내 팔 위로, 손등 위로 투둑 떨어졌다.


  눈물들은 내게서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나는 내가 울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상황이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애써 미소를 지으려고 해보았다. 나를 가둬놓는 유리벽에서 빠져나왔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행복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했다, 손을 올려서 뺨을 감쌌다. 뺨 위로 길이라도 만들 것처럼 바르게 흐르던 눈물들은 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갈라졌다.




  가족들이 데리러 오기로 한 시간이 점점 가까워졌고 시간은 자꾸 흐르는데 나는 숙소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제 들어가서 빨리 세수를 하고 아빠를 기다려야 하지만, 울었던 흔적을 지워내고 엄마 앞에서 방긋 웃어야 하지만, 현실은 먼 나라의 이야기인 듯 동생과 재잘거려야 하지만.




  숙소 현관문 앞 계단에 앉아서 나는 말도 안 하고 그냥 눈물만 천천히 흘려보냈다. 나는 우는 걸 싫어했다. 눈물이 많은 편도 아니고. 이렇게 우는 건 딱 한 번이면 충분하니까, 나중에 또 울지 않도록 지금 다 흘려버리자. 그런 생각으로 조용히 다 흘려보냈다.


  숙소의 문은 낡아서 열리고 닫힐 때 마다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고 이어서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계단에 앉아서 부르르 떨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는 아주 가까웠다. 소리의 주인공은 내 옆에 털썩 자리를 잡았다.



  “있잖아,”

  “…….”

  “아이스크림 사다놨어.”

  “…고마워.”

  “언제든지 먹어도 돼.”

  “응.”



  “언제든지 괜찮아. 정말로.”



  동우 형이 내 옆에 앉아서 그렇게 말했다. 감정은 거기서 무너졌다.











U.



  텔레비전을 보면 내가 저기에 나오곤 한다는 사실이 안 믿길 때가 있다. 화려하고 예쁘고 뭐든지 잘 될 것만 같고. 그런 세계가 나는 사실 익숙하지 않다. 고생한 시간이 길어서 그러는 게 아니겠느냐고 아이돌 친구가 대답했었다. 무명 시절을 겪어보지 않은 친구였다. 나는 그냥 푸스스 웃어버리고 말았다. 고생한 시간이 길어서. 고생한 시간. 예전에. 오래 전에. 그 시간에.


  나는 비틀려있다. 행복을 그냥 행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그냥 행복하면 되는데. 그 단순함이 내게는 복잡하다.




  텔레비전에서는 오래 전에 흥행했던 영화를 방영해주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다 발견한 영화의 제목에 나는 채널을 고정하고 시선도 고정했다. 이거 볼 거야? 거실 소파에 기대서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던 동우 형이 물었다. 응. 이거 볼래. 그러자 동우 형은 제 옆자리를 탁탁 두드렸다. 나는 리모컨을 내려놓고 동우 형 옆으로 가서 앉았다. 형은 몇 번 휴대폰을 들여다보더니 곧 게임을 끝냈다. 게임 오버야?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 두었다. 동우 형은 신이 나서 설명해주겠지만 별로 듣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다.


  영화 속에서, 남자는 여자를 사랑하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어느 날 부터인가 오지 않는다.



  “왜 자기라고 부르는 걸까?”



  동우 형의 어깨에 기대어 있다가 문득 물었다. 으응? 동우 형이 시선은 여전히 텔레비전에 고정한 채로 되물었다. 사랑스럽다. 분명,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렇게 나를 설득했다. 사랑하니까 사랑스럽게 느껴야 한다고.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그리고 나는 동우 형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아니, 그니까 왜 연인 간에 ‘자기야’ 라고 부르는 건지 궁금해서.”



  자기라는 말은 그야말로 자기 자신, 스스로를 말하는 거잖아. 형의 어깨에 이마를 부비작거리며 설명을 덧붙이자 그제야 알아들은 형이 내 뺨을 짚었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는 형을 보다가 전기에 감전된 듯 찌릿한 느낌에 시선을 돌렸다. 눈이 마주치면 나는 깜짝 놀라곤 한다. 벌써 2년, 사귄지 2년이 지나갔는데 여전히 눈을 마주치면 놀란다. 동우 형이 이토록 나를 사랑하는구나. 내가 이렇게 올곧고 충성스런 사랑을 받아볼 수도 있구나. 이렇듯 강렬한 사랑이 눈동자에 또박또박 써있어서 나를 또 놀라게 한다. 지금처럼. 지금도.



  “봐봐.”



  동우 형이 내 손을 잡고 우리 둘의 눈높이까지 들어올렸다. 내 손이 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냥 평소랑 똑같은 손인데. 내 손에 뭐가 묻어있나 봤지만 그런 건 없었다.


  이쁘지? 형이 내게 물었다. 뭐가? 동우 형은 가끔 실없는 소릴 해서 나를 부끄럽게 했다. 형의 입에서 시도 때도 없이 새어나오는 예쁘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은 매일매일 쌓여만 가고 작은 내 가슴에 다 담기지 못해 흘러넘치곤 한다. 부담스러운 건 아니었지만 어딘가 미안했다. 지금도. 스스럼없이 예쁘다고 말하는 지금이 꼭 그런 때였다. 그럴 때면 나는 모르는 척 넘어가려고 애썼다. 두근거림은 갈피를 못 잡았다.


  그러니 사랑스럽다고 느껴야 하는데. 사랑해야 하는데.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데.



  “봐봐. 니가 볼 땐 니 손이니까 이쁘지?”



  잠시 갸웃, 머뭇거리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애인 앞이어도 스스로 예쁘다고 인정하는 건 창피하다. 이번에도 아닌 척, 부끄럽지 않은 척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나에게 사랑한다 예쁘다 말하고, 나는 못 알아들은 척 하고. 그럼 형이 다시 한 번 짚어 주고 나는 못 이겨 화답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동우 형은 평소와 다르게 진지해서, 그걸 코앞에서 보는 나는 절로 미소가 번졌다. 아이 같아도 될 때 아이 같고, 어른스러워야 할 때 어른스럽다. 이상적이고 존경스럽다. 연애든 결혼이든 이 사람은 상대를 진심으로 예뻐하겠지. 나는 정말 분에 넘치는 사람을 만난거야. 신이 내 편이었던 거야. 나는 분명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과연, 사랑스러운가?


  나는 또 내게 물었다. 오늘 뿐 아니라 2년 내내 내게 물었다. 너 정말 사랑하니? 사랑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음 네가 받고 있는 이 분수에 넘치는 사랑을 어떻게 갚을래.

  내가 내게 던지는 이 질문과 다그침은 아마 우리 만남이 끊어질 때 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나 미안하고 서러웠다. 내가 밉다.



  “나 자신이라면 당연히 이쁘게 보이지. 근데 사랑하는 사람도 그만큼 이뻐 보인단 말이야? 나 자신이 아닌데 왜 이렇게 이쁘게 보이나… 하는 생각을 막 하다보면,”

  “하다보면?”

  “이미 내가 이 사람을 나랑 동등하게 두고 있구나, 하는 결론이 나오는 거야.”



  뭐야 그게. 진지한 형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웃어버렸다. 아이 같아도 될 때 아이답고, 어른스러워야 할 때 어른스럽다. 진실로 믿고 따를 만한 사람인 건 분명하다. 어른스럽게 내 무지를 채워주고, 그 후에는 아이처럼 내가 새로 배운 것을 터득하도록, 되새기도록 한다. 나를 자각하게 하고 설레게 하고 또 웃게 하는 사람. 내 애인. 그렇다면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하나?


  자꾸만 되돌아오는 질문 때문에 내가 너무 한심했다. 그냥 평범하게 사랑에 빠지면 될 것을. 나는 왜 자꾸 불행해지려고 하지.


  한숨을 쉬는데 동우 형이 여전히 내 손을 꼭 잡은 채 마무리했다. 온전한 사랑. 그래서 내겐 과분한 사랑을.



  “그래서 자기라고 부르는 거지. 자기 자신만큼 사랑해, 의 줄임말이야.”



  어설프지만 당당한 설명이었다. 글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천진하고 엉뚱한. 내가 쿡쿡 웃으니까 동우 형도 조금 부끄러웠는지 나를 따라 웃었다. 그건 어디서 주워들은 거야? 미소 지은 채 물으니 동우 형은 내 뺨을 감싸오며 핀잔을 주었다. 널 보면서 항상 떠올리는 생각이야. 나 너 정말 사랑하나 봐, 자기야. 이쁜 막내야.


  형이 나를 칭한 그 단어에 뺨이 붉어졌다.




  그 때, 동우 형이 나를 향한 올곧은 사랑으로 행복해하고 있었을 때, 못된 나는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말았다.




  옅게 짓고 있던 미소가 사라져버리고, 나는 깨달았다.






  자기 자신만큼 사랑해서 자기라고 부른다면,


  그렇다면 지금 이건 아니야. 나는 절대 그렇게 부를 수 없어.






  나는 비틀려있다. 행복을 그냥 행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그냥 행복하면 되는데. 왜 그러지 못하지. 어째서 이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지.






  영화 속에서, 남자는 여자를 기다리지만 여자는 오지 않는다. 끝끝내. 남자는 시간이 많이 지나고 여자를 잊었지만, 동시에 잊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앞에 소년이 나타난다. 소년은 남자에게 오지 않은 여자와 닮았다. 여자는 사실 죽어서 남자에게 오지 못했고, 남자는 여자의 환생인 소년을 사랑한다. 그는 소년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불행히도.


 사실 선택권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울어버렸다. 눈물이 적은 편인 내가 이 철 지난 영화에 우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다. 동우 형은 내가 성규 형과 헤어진 날 이후로 내가 우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다. 운다고 하더라도 가는 눈물 몇 줄기 흘리고 닦아내는 것이 그만이었다. 동우 형과 함께 하면서는 울 일이 없었다. 정말이지 슬프게도.


  나는 헤어짐 때문에 울 때에나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니, 분명 지금의 눈물도 헤어짐을 의미한다. 동우 형이 내 눈물의 의미를 알지도 모르는데 야속하게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











V.



  동우 형에게 사귀자는 말을 처음 들은 건 내가 성규 형과 헤어지고 반년 정도가 지난 때였다. 성규 형과 헤어졌던 날에도 동우 형은 내게 ‘언제나 괜찮다’고 말했었지만, 나는 동우 형과 사귈 수가 없었다. 도저히. 상식적으로도 그건 말이 안 됐다.


  우리 생애의 첫 1위를 하고 기분이 좋아져서는, 내게 달려와 동우 형은 나를 붙들었다. 어깨를 꽉 붙잡는 손아귀 힘이 무척 셌다. 멍이 들까 걱정이 될 정도로. 사귀자.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형은 그렇게 말했다. 눈을 더 마주치고 있으면 그 기운에 압도될 것 같았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빨리 거절했다. 내 입에서 그건 안 된다는 말이 떨어지자 형의 손에는 힘이 더 들어갔다가, 스르륵 풀렸다. 아주 힘든 일이라도 거쳤다는 듯 침이 꼴깍 넘어갔다.






  동우 형은 착하고 긍정적인 사람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것에는 포기를 모른다는 점도 그 때 처음 알았다. 고백을 거절했다고 안도했던 내가 바보 같을 정도로 동우 형은 고백을 이어나갔다.



  “나랑 만나자.”

  “그건 안 되겠어요.”


  며칠을 주기로 이어지는 고백에 두들겨 맞은 내가 점점 힘이 빠져가고 있을 때였다. 언제나처럼 동우 형의 “사귀자”와 나의 “안 돼요”가 마치 커플처럼 흘러나왔고, 나는 오늘도 무사히 거절했다는 점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 날은 조금 달랐다. 형과 내가 인사처럼 주고받던 고백과 거절이 처음으로 궤도를 달리했다.

  급하게 그 자리를 떠나던 나를 잡고, 동우 형의 간절한 목소리가 닿았다.



  “나는 그래도 좋아. 너 아픈 거 낫도록 도와주는 것뿐이라고 해도 좋아. 너에게 사랑받지 못해도 네가 좋고, 너에게 사랑받을 수 없을 거라고 해도 네가 좋아. 아마 계속 그럴 거야. 네가 누굴 생각해도 나는 널 좋아할 거야. 그건 정말 믿어도 돼.”

  “…….”

  “그건 정말 믿어줘야 해, 성종아.”



  돌아서는 내게 와르르 쏟아진 고백. 동우 형이 “사귀자”는 말 한 마디에 언제나 구겨 넣었던 그 길고 다정한 말. 내가 일부러 펼쳐보지 않으려 했던 고백. 내가 피하자, 동우 형은 끝내 그 말들을 펼쳐 내 앞에 내보였다. 머리 나쁘고 마음씨도 나쁜 내가 피할 수 없도록.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동우 형은 내게 정말 모든 걸 다 내주고 있었다. 밑바닥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여린 마음까지. 그저 거기 있어달라는 부탁. 동우 형 같은 사람이 어째서 나를 좋아해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는 인정해야 했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인정해야 했다. 그 사랑이 진심이라는 것, 그리고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도.



  “사랑은 내가 다 할 테니까 넌 그냥 연애만 해.”



  동우 형의 진심이 가득 담겼지만 어딘가 말이 이상한 그 고백은 결국, 나를 돌아보게 했다. 그 고백은 그렇게 마지막 고백이 되었다.




  그 날 형은 나를 감싸주겠다고 말했었다. 그렇지만 형은 알고 있었을까. 형이 내게 준 사랑은, 단지 내 상처를 낫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나를 살게 했다는 것. 사막에 떨어진 내게 내밀어진 물이었고, 뜨거운 여름날의 그늘이었다는 걸. 형은 알고 있을까.


  상처가 나아 어른이 되면 다른 사람에게 달려갈 나를, 형은 알면서도 선뜻 사랑해주었고 참아주었다.


  내게 용기가 생긴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말. 첫사랑으로 죽어가던 나를 형이 살려놓았다고. 살아나면 다시 첫사랑에게 달려갈 이 마음을 알면서도 나를 안아준 당신은, 나를 어른으로 만든 거라고. 내가 평생 갚아야 할 사랑이라고.










W.



  2013년이 거의 끝났다. 이제 우리는 공백기가 있어도 혹시나 대중에게 잊힐까 걱정하지 않는다. 적어도 덜 걱정한다. 다행히도 그렇다.


  스케줄이 잠시 빈 나는 홀로 남아서 숙소를 지키고 있었다. 성규 형은 새 앨범에 작곡과 작사를 참여한다고 작업실에 틀어박혔고, 동우 형과 호야 형도 유닛의 정규 앨범을 준비했다. 결국 나만 심심해졌다. 라디오도 듣고 TV도 보고, 다운받은 영화도 다 보고나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려니 갑갑해서 결국 옷을 챙겨 입고 신발을 신었다. 시간은 벌써 밤 열두시를 지나 한시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산책이 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날이 꼭 있기 마련이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세찬 빗줄기에 잠깐 망설였지만, 우산을 하나 집어 들고 숙소를 나섰다. 걸으면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동우 형은 그 날 엉엉 우는 나를 다그치지 않았지만 달래주지도 않았다. 어쩌면 동우 형도 이제 지쳤으리라. 아무리 사랑해봤자 밑 빠진 독처럼 나는 그 사랑을 다 흘려버린다. 얼마나 허탈할까. 분명 사귀는 사이인데도 기약 없는 짝사랑을 하는 기분이겠지.


  터덜터덜 내려가 경비 아저씨에게 인사를 하고, 우산을 펼쳐들고 밖으로 나섰다. 단지를 몇 바퀴 빙빙 돌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똑같은 곳만 맴도는 나를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겠지만 그런 건 별로 상관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산책이 하고 싶어 죽겠으니까.






  아파트 단지를 몇 바퀴 돌았을까. 처음 나왔던 출입문 가까이를 지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이리저리 살피다 역시 익숙한 벤 앞에 서 있는 둘을 발견했다. 우산을 뒤로 젖히고 눈을 깜빡이자, 흐릿한 가로등 밑에서도 그 둘이 누구인지 또렷하게 보였다.



  “성종아!”



  호원이 형이 손으로 머리 위를 가린 채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옆에 동우 형도 있었지만 동우 형은 손을 흔들지 않았다. 조금 놀란 표정이었지만 그나마도 곧 수그러들었다. 절로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막고 가까이 다가갔다. 우산 들고 다니지. 감기 걸릴 텐데.


  가까이 다가가 우산을 셋이 나눠썼다. 간신히 머리만 안 젖을 정도의 공간. 이게 뭐야, 바보 같아. 입술을 삐죽대는 내 어깨에 팔을 올리며 호원이 형이 나를 재촉했다. 어린애들처럼 셋이서 우산을 같이 쓰고 현관 로비까지 들어갔다. 형들을 실내까지 데려다주고, 나는 뒷걸음질 쳤다. 동우 형과 눈이 마주쳤지만 곧 시선을 피했다. 호원이 형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난 산책 계속 할래요. 우산을 털며 선언하는 내 엉덩이를 호원이 형이 두드렸다. 조심해. 나쁜 사람이 잡아갈 지도 몰라. 그 장난 어린 말에 나는 웃고 말았다. 들어가서 잠이나 자요, 정말. 작게 웃는 나를 두고 호원이 형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동우 형은 머뭇거리다가 호원이 형을 따라갔다.




  동우 형이 대화하려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니야, 이러다 나중에 더 나쁘게 되면 어떡하지. 두 가지 생각이 머리를 맴돌았다. 잡념을 떨치려고 산책을 한 건데 오히려 더 큰 고민을 얻었다.






  몇 바퀴나 더 돌았을까. 겨울비에 몸이 꽁꽁 얼어버려 이제 정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뒤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쁜 사람이 잡아갈 지도 모른다던 호원이 형의 말이 생각나 급히 뒤를 돌아보자, 나쁜 사람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착한 사람이 내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면서도 멈추지 않았던 걸음을 멈추고 동우 형을 기다려주었다. 가까이 다가올 거라 생각해 우산을 조금 높게 들었지만 동우 형은 내게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멈췄다. 급히 달려온 동우 형의 숨이 거칠었다.


  동우 형이 숨을 고르고 말을 꺼낼 때까지 나는 얌전히 기다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가 얼마나 나쁜 사람인지 되새겨볼 시간으로는 충분했다.



  “있잖아요, 애인님.”



  자정을 넘긴 밤. 뛰어와서, 숨을 몰아쉬면서, 비까지 맞으면서, 이렇게 2년을 만난 애인의 앞까지 와서.


  동우 형이 내게 물었다. 끝까지 남을 배려해야 하는 사람. 2년간 고통만 안겨준 사람에게 선택권까지 쥐어주는 사람. 내가 만들었다.



  “우리 헤어질래요?”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했는데, 직구로 날아오는 질문에 나는 점수를 내주고 만다. 아팠다. 동우 형의 그 자상한 마음을 미처 다 헤아릴 수 없어서 나는 물었다. 바보같이. 너무 착한 말이어서, 진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동우 형, 나랑 헤어지고 싶어졌어?”



  동우 형은 아직 울지 않았지만, 눈물은 고여 있었다. 눈을 한번이라도 깜박이면 주르륵 흘러내릴 것 같았다. 눈은 커다랗고, 또 흐릿했다. 검은 눈동자가 눈물에 막혀 맑지 못했다. 붉어진 눈가에 나는 할 말을 잃는다.



  “아니, 성종아. 그런 건 절대로 아니야.”



  애인님이랑 헤어지는 거 절대로 싫어. 동우 형이 힘없이 웃으며 덧붙였다. 그 웃음에 나는 또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나는 우리 애인님이랑 헤어지기 싫지만…”

  “그래도”


  “헤어질까?”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하는 그 입술이 뱉은 또 한 번의 질문에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여전히 길가에 서서 비를 맞는 동우 형에게, 나는 걸어갔다. 꼬옥 쥐고 있던 우산은 비가 고이도록 길바닥에 내려두고 형에게 가까이 갔다. 이렇게 단단한 빗줄기를 우산 없이 맞아보는 게 얼마만인지. 내가 그 감촉을 다 잊어버렸었나 보다. 빗방울이 두드리는 내 몸이 끔찍하게 아픈 걸 보면.

  이 정도의 아픔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연애도 해본 적 있는데. 매일매일 단단한 벽 앞에서 하냥 울기만 하는 연애를 해봤었는데. 어째서 이 정도의 고통에 이렇게 아픈지 모르겠다.


  동우 형이 주는 거짓 없는 사랑과 매일 매일 똑같이 나를 향하던 애정. 그런 달콤함에 취해서 그동안 꿈길이라도 걸었나 봐. 그래, 나한테는 과분했어. 나를 살려놓았지만, 내가 받을 사랑은 아니었던 거야.




  나는 차분히 동우 형을 안았다. 오래 전 그 어느 날 형이 나를 안아주었던 것처럼. 내 마른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형은 숨을 죽였다. 위로하고 싶은데 내가 그럴 입장은 아니어서 슬펐다. 그토록 오래 나를 사랑하고 아껴준 사람에게 위로조차 하지 못하게 되어버렸다. 서글프고 억울했다. 헤어지기 싫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라서.



  "헤어지자."



  동우 형이 선언하듯 말했다. 그건 우리의 관계를 바꾸는 선언이라기보다는, 동우 형 스스로의 마음을 잘라내는 선언으로 들렸다. 가슴이 아팠지만, 동우 형이 나보다 더 아프리라는 판단은 할 수 있었다. 내가 더 아프고, 한 열 번 정도 더 버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를 겪으면 동우 형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2년 동안 연애를 한 것이 아니었다. 헤어지는 데 2년이 걸렸을 뿐이다. 그리고 그건 온전히 나의 잘못이었다.






  그렇게 이별 통보를 받았다.


  내 마음 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나쁜 나에게 꼭 어울리는 엔딩이었다.